[믿음의 사람] 김응락 장로의 순교,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 세우다
[믿음의 사람] 김응락 장로의 순교,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 세우다
  • 정성경‧이경준 기자
  • 승인 2020.06.16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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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교회를 지킨 김응락 장로의 순교
1950년 10월 6.25전쟁으로 주변이 전부 파괴되고 홀로 서 있는 영락교회(당시 위임 목사 한경직) 전경. 1949년 3월 24일 석조전을 건축하는 기공식을 거행하고, 8월 15일 신축교회 정초식(머릿돌)을 가졌다. 1950년 6월 4일에 미완성의 예배당에서 입당예배를 드렸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본당은 공산군이 점령하고 대다수의 교인들은 피난했다. 그러나 교회를 지키고자 피난하지 않았던 김응락 장로의 순교와 성도들의 기도로 영락교회당은 안전할 수 있었다. 헌당예배는 이후 1954년 12월 19일에 드렸다. 영락교회 제공

 

“나는 이 교회 장로다”

삶으로 짓고, 지킨 영락교회

역사로 흐른 그의 순교정신

“교회 부흥과 발전의 일로”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락교회 4천여 성도들은 석조전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38선 부근에서 공산군과 국군이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뉴스를 방송과 신문으로 들은 교인들이었지만 모두들 흔히 있는 국지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26일 저녁, 서울 시내에서도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27일 김치복 장로를 비롯한 장로 몇 사람의 권유로 한경직 목사는 피난길에 올랐다. 김응락 장로를 비롯한 몇몇 교인들이 남아 영락교회를 지켰다.

6.25 전쟁 발발 후 7월 2일 주일, 6.25 전쟁 후 첫 주일이었지만 서울 시내의 교회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영락교회는 교회 문을 열고 주일을 지켰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김 장로 집에 모여 앞으로도 주일예배를 지켜 나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인민군이 영락교회를 무기고로 사용하면서 예배당에서 주일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석조전이 무기를 보관하기에 적정하고, 무엇보다 예배당에 무기를 감추어 두면 국군과 미군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락교회 교인들은 승동교회를 빌려 예배를 보곤 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각자 자기 가정에 숨어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신앙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김 장로는 인민군의 눈을 피해 심방을 다니며 교인들을 격려했다.

인천 상륙작전을 며칠 앞둔 9월 24일, 김 장로는 교회 근방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러 가다 예배당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발길을 교회로 돌렸다. 교회 문이 굳게 잠겨있고 교회 구내는 인민군들이 철수하였는지 조용하자 교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고필용 장로 부인이 구내에 있다가 급히 달려 나와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돌아가세요, 아직도 인민군들이 예배당 안에 있어요."

그와 동시에 인민군 하나가 총을 들고 달려와 김 장로에게 총을 겨누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김 장로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나는 이 교회 장로다.“

김 장로는 곧바로 중부 경찰서로 연행됐다. 얼마 있으니 김인모 장로의 아들 김만이라는 청년도 끌려왔다. 그때 이미 김 장로는 여기저기 얻어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취조가 끝난 후 인민군은 김 장로와 김만 청년에게 수갑을 채운 채 다시 교회로 끌고 가 계단을 올라가도록 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면 본당 남쪽으로 빈 터가 있는데 두 사람은 거기서 총살당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때 구내에 있던 전성천 목사의 장모가 김 장로를 보고 달려 내려와 계단 중간쯤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김만 청년을 앞세우고 올라가던 인민군이 계단 끝에 이르러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김 장로에게 빨리 올라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두 사람이 계속 말을 주고받자 화가 난 인민군이 달려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김만 청년이 수갑을 찬 채 온 힘을 다해 달아나고 말았다.

김만 청년을 놓친 인민군은 금방이라도 총을 쏠듯이 흥분하며 김 장로를 끌고 가려했다.

"5분만이라도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나오게 해주시오."

김 장로가 간곡하게 인민군에게 부탁했다. 인민군은 마지막 5분간 기도 시간을 허락했다. 김 장로는 석조전 예배당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천장 한쪽이 무너져 있고 바닥에도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인민군 무기고라는 것을 눈치 채고 미군이 폭격을 했는지도 몰랐다. 무기들은 이미 철수를 했는지 잘 보이지 않고 화약 냄새만 진동했다. 교인들이 많을 헌금을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 사재를 털어 가면서까지 세운 예배당의 처참한 모습 앞에 김 장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성전 완공 후 기념 사진. 교회 제공

그는 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수갑을 찬 두 손을 모았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신 예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온 44년의 세월과 신앙생활에 헌신해온 29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피난준비를 하고 있을 아내와 영걸, 영철 두 아들, 그리고 시집간 딸 성애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주여, 이 나라와 이 교회와 우리 가족과 내 영혼을 당신께 부탁하나이다."

인민군은 김 장로를 본당 남쪽 빈 터로 끌고 가 무릎을 꿇게 했다. 수천 명의 교인들로 웅성거리던 교회 뜰에 그 시간에는 김 장로는 혼자 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차가운 총부리가 김 장로의 머리에 와 닿았다.

"탕!" 총성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이는 조성기 목사가 쓴 ‘한경직 평전’(김영사)에 실린 김응락 장로에 대한 내용이다.

고 김응락 장로. 교회 제공

1954년 9월 23일 45세의 일기로 영락교회에서 순교한 김 장로는 1906년 5월 6일 평안북도 의주(義州)군 고관(古館)면 소군무등섬에서 농가 김기평(金基平)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7세부터 주일학교에 출석해 15세에 세례를 받고, 19세에 용천(龍川)군 덕흥교회에서 집사로 헌신했다. 23세에 신의주로 옮겨 윤하영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신의주 제일교회 집사로도 봉사했다. 1935년에는 신의주 노송동에 옥상회라는 포목상을 창업해 신의주 굴지의 사업가가 됐다.

김 장로는 늘 기독교 선교 및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아 33세가 되는 1938년에 기독교인 자제 교육기관인 신의주 일신학교(日新學校) 설립이사가 되고, 그 다음해 신의주 유일의 사회봉사기관인 보린원(保隣院)에 거액을 기부해 설립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빈곤한 청년을 위해 장학금을 기탁해 많은 인재 육성에도 기여했다.

1940년 서울로 옮겨 38세 되는 해 안동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고, 1947년 해방을 맞아 영락교회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로 교적을 옮겨 1948년 6월부터 영락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1947년에는 한경직 목사와 안동교회 최거덕 목사 두 분의 권유로 새로운 기독교언론사업에 투신해 한국기독교연합회의 기관지이자 당시 기독교계의 유일한 언론매체인 기독교공보사(基督敎公報社)를 인수 운영했다. 그리고 1949년 3월에 영락교회 본당건축이 시작되자 건축위원으로 자기사업은 뒤로하고 당시 건축에 걸림돌이었던 자재 조달에 전력함으로 성전 준공에 크게 기여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지은 성전이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공산군에게 점거되자 김 장로는 성전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포기하고 교우와 교역자 가족의 생활을 살피는 등 수시로 교회를 돌봤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23일 잔류하고 있던 공산군에 잡혀 고문을 당한 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올리고 성전 앞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1960년 8월 8일, 김 장로의 순교로 교회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후손들은 영락교회당 오른쪽 입구에 ‘김응락 장로 순교비’를 세웠다.

영락교회당 오른쪽 입구에 세워진  ‘김응락 장로 순교비’. 이경준 기자

1972년 영락교회에서 발행하는 ‘영락’에 ‘선배들의 신앙을 찾아서’라는 순서에 당시 청년부 회장 최종고 청년의 ‘고 김응락 장로님 편’이라는 글이 실렸다. 최 청년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공산주의가 싫다고 내려온 영락의 식구들 그러나 공산주의의 죄악을 피난함으로써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요, 함께 공동으로 져야했던 수난의 십자가를 우리의 김응락 장로님께서 대신 지시고 가셨다. 그 댓가로 서울의 모든 건물들이 그렇게 파괴되던 상황 속에서도 영락교회는 아무런 파괴도 입지 않고 견디다 다시 교우를 맞았다. 이 피의 댓가 위에 다시 시작된 영락의 역사는 부흥과 발전의 일로였다”고 적었다.

현재 김 장로의 자녀로는 장남 김영걸 포항공과대학교 교수, 차남 김영철 숭실대학교 명예교수가 있다

2000년 9월은 김응락 장로의 순교50주년이었다. 영락교회에서는 고 김 장로를 위한 추모예배를 드렸다.

1964년부터 영락교회를 섬기고 있는 강신만 장로는 “순교라는 게 절대 쉬운 게 아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던 고 김 장로님의 순교정신을 잊지 않고자 노력 중”이라며 “이러한 순교 정신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전하는 게 현재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전쟁 70주년을 맞아, 고 김응락 장로 순교비문을 묵상해본다.

“무거운 발길을 옮겨 골고다로 향하신 피어린 주님 발자국 따라 생을 다하고 의의 길 택하시오며 모진 붉은 돌에 쓰러지시올때 스데반의 미소 또한 그 광채 만면에 사무치고 마지막 한 방울 피 흘리시도록 영락의 제단 부둥케 안으사 숨을 거두셨으니 베다니 뜰에 첫 번 맺은 순교의 원공은 장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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