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기독교미술과 믿음의 발자취 ③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전문가 칼럼] 기독교미술과 믿음의 발자취 ③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 임재훈 목사
  • 승인 2020.06.13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1520년대에서 1590년대까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사이에 나타난 미술양식을 매너리즘(Mannerism)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인들은 르네상스의 쇠퇴기라는 의미로 후기 르네상스(Tardo Rinascimento)로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바로크 비평가들이 고안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즉 매너리즘 미술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기법(마니에라, Maniera)을 모방하는데 급급하고 전시대에 이룩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과장함으로 고전주의가 이룩한 완벽한 비례, 균형, 조화의 규범을 파괴하여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반고전적, 퇴폐적 미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매너리즘 양식은 종교개혁(1517),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 1527), 반종교개혁운동을 유발한 트렌토공의회(1545-63) 등 16세기 전 유럽을 동요시켰던 정치, 경제, 종교적 격변기 위기의식의 예술적 표현으로 평가되고 있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가 추구한 조화, 이성, 현실성 대신 부조화, 감성, 상상을 강조하는 미술로 자연의 사실적 재현보다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였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가 산출한 미의 원리와 자연의 규범에서 벗어나 확실한 공간감과 인체비례를 부정하고 임의적인 구도와 인체의 장신화(피구라 세르펜티나타, Figura Serpentinata: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불꽃처럼 길게 늘어진 곡선의 형상)라는 표현방법을 취하였다. 매너리즘은 알레고리적 관념과 우미(優美)를 미적이념으로 자연미를 능가하는 예술미를 추구하였으며 작가의 주관과 개성적인 양식을 추구한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이다.

2. 크레타 출신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인물로 반종교개혁기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미술로 구현하였다. 그는 제단화, 묵상화, 초상화 등의 종교미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종교적인 신비, 영적인 세계를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가주의 미술의 시조였다.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알려진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énikos Theotokópoulos)는 1541년 크레타의 칸디아(이라클리온)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크레타는 베네치아공국의 보호령이었다. 그는 관리였던 부친과 달리 이콘화가 미하일 다마스키노스(Michail Damaskinos)로부터 미술수업을 받았으며 1563년 마에스트로의 경지에 이를 만큼 비잔틴 성상화가로 역량을 발휘하였다.

1567년 베네치아로 이주해 티치아노의 문하에서 베네치아 미술을 수용하였으며 특히 틴토레토, 야코포 바사노와 교유하였다. 1570년부터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1577년 톨레도에 정착해 스페인 신비주의 영성과 반종교개혁신학과 조우하며 독특한 종교미술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르네상스 인문학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지중해 3국 다문화의 융합과 통섭을 통해 르네상스 미학을 능가하는 근대미술을 성취하였다.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무시하고 환영을 나타내는 빛과 색조, 길게 늘어난 인물, 특유의 구도로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여 이성이 아닌 영성과 감성의 미술을 표방한 그는 바로크 이래 외면되어 오다가 20세기에 피카소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자화상(어느 노인의 초상), 1595-1600, oil on canvas, 52,7x46,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화상(어느 노인의 초상), 1595-1600, oil on canvas, 52,7x46,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3.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The Burial of the Count Orgaz, 1586-88)는 엘 그레코의 성숙기 작품이다. 여기에는 비잔틴의 신비주의, 티치아노의 색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구도, 틴토레토와 바사노의 빛, 매너리즘의 신체, 뒤러의 구성까지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요소들이 화면에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엘 그레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융합, 통섭되어 전적으로 새로운 예술을 구현하고 있다.

이 제단화는 생전에 기부를 많이 한 백작의 장례(1323)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누스가 나타난 전설을 소재로 한다. 화면은 구름을 경계로 천상과 지상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상의 인물들이 자연주의 기법으로 충실하게 묘사된 반면 천상의 그리스도와 성인들은 흐릿하고 신비한 매너리즘 인물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두 세계의 차이를 묘사하기 위해 빛과 색채, 인물들의 비례, 붓질의 밀도를 차별되게 구사하였다. 지상과 천상 사이의 공중에 천사가 갓 태어난 아기 모습의 백작의 작은 영혼을 품고 하늘로 오르고 있으며 등을 돌린 사제는 이 장면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아마포로 된 중백의를 통해 비쳐지는 사제의 검은색 제의 묘사에서 엘 그레코의 탁월한 자연주의 기법의 역량이 나타나고 있다.

장례미사(requiem)를 집례 하고 있는 사제는 이 작품의 주문자 안드레스 누녜스이다.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들은 동시대의 반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손의 움직임과 젖은 눈빛, 빛을 발하지 않는 횃불로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경탄하는 사제 왼쪽의 좌측면 얼굴을 보이는 백발의 인물은 작가의 친구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로 그는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였다.

좌측 하단에서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소년은 화가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다. 그는 성 스테파누스 부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시신을 매장하는 장면을 가리킴으로 관람자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심리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들의 손수건에는 그의 출생연도(1578)와 작가의 서명이 그리스어로 기재되어 있다. 기부와 선행을 많이 한 백작의 일화를 통해 반종교개혁기 가톨릭의 공로사상을 부각한 작품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1586-88, oil on canvas, 480x360cm,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1586-88, oil on canvas, 480x360cm, 톨레도 산토 토메 교회
수태고지, 1596-1600, oil on canvas, 350x174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위 아래로 늘어진(elongated) 인물상과 천상과 지상의 계층 개념이 나타난다.
수태고지, 1596-1600, oil on canvas, 350x174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위 아래로 늘어진(elongated) 인물상과 천상과 지상의 계층 개념이 나타난다.
성 요한의 환영, 1608-14, oil on canvas, 222,3x193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실의 비물질화, 영적세계의 가시화를 구현하려한 엘 그레코 후기양식의 절정이다.
성 요한의 환영, 1608-14, oil on canvas, 222,3x193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실의 비물질화, 영적세계의 가시화를 구현하려한 엘 그레코 후기양식의 절정이다.
임재훈 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 문화예술연구원장 예술과목회연구원 연구위원
임재훈 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 문화예술연구원장 예술과목회연구원 연구위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