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 특집] “아버지,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정의달 특집] “아버지,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0.05.2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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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만 특별한 동네교회 이야기’라는 슬로건으로 유튜브를 통해 작은 교회들을 조명하고 있는 골목교회의 핵심가치는 ‘위로와 연결’이다. 교회의 규모가 목회적 성공척도가 되는 사람들의 시선,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던 허유빈 목사(주안장로교회 중등3부 담당), 김신약 목사(한국기독교협의회 연구원), 박병도 목사(높은뜻광성교회 1청년부 담당)에게 목회자 자녀로 살아가는 그들이 목회자가 된 이야기를 들어봤다.

왼쪽부터 김신약 목사(한국기독교협의회 연구원), 허유빈 목사(주안장로교회 중등3부 담당), , 박병도 목사(높은뜻광성교회 1청년부 담당). 정성경 기자

 

아버지로서는 빵점이지만

목사로서는 존경스러워…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목사의 모습은?

김관진 목사(제주 푸른초장교회)와 김신약 목사

김신약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되게 활동적이고 저돌적이고, 진취척, 행동적이시다. 가정에서 일어난 일 보다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에서 그렇게 느꼈다. 가정과 교회를 분리해서 생활할 수 있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평생 사택에서 컸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목회자의 가정이지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떤 교회를 가시든 교회를 건축하시거나 어린이집, 요양원을 운영하셨다. 철저한 계획 아래 사역들을 진행하고 성취하고 불가능해 보일 것도 직접 발로 뛰면서 일을 하셨다. 전에 계시던 교회에서 21년간 사역하시고 현재 개척한지 3년 되는 교회에서 대여섯분의 성도님들과 목회를 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여러 면으로 봤을 때 나는 못할 것 같은 용기있는 사역들을 감당하셨다. 군대를 갔다와서 어머니가 미안해하셨던 게 어렸을 때 심방을 갔다 해질녘에 들어오시면 so가 항상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누나가 두 명이었지만 7살 차이가 나다보니 혼자 있었던 기억이 많다. 요즘 아버지들과 비교하면 빵점이지만, 되도록이면 매주 토요일에 늘 자전거 뒷좌석에 나를 태우시고 목욕탕에 다니셨다. 그땐 싫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와 나의 신학은 다르다. 아버지의 신학은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삶은 존경할 수밖에 없다.

박병도 어렸을 때 ‘누구의 아들’이 아닌 ‘어느 교회 아들’로 불렸다. 아버지가 단독 목회를 하셨는데 내가 외동이라 집에 혼자 많이 있었다. 옆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부모님이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빵점이다. 가정에서의 모습이 목회의 연장이었다. 매일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때문에 휴가를 갔다가도 금방 돌아와야 되는 상황이었다. 여행이라곤 친가, 외갓댁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옆에 없었던 적은 없다. 넉살이 좋아서 부모님이 심방 가시면 동네 집사님 댁에서 놀고 있으면 부모님이 오셔서 데리고 가셨다. 동네에서 큰 것 같다. 아버지는 곧고 무서운 분이셨다. 스스로 책임져야 되기에 자립심이 강해졌던 것 같다. 사춘기 때는 친구들이 알바하는 것보다 적은 사례를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왜 하시지 생각도 했었다. 묵묵히 자신의 정직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좋게 보이는 시점이 되니까 더 강화된 것 같다. 돈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는 길이 좋은 길이구나 경험했다. 시골목회 하시는 것을 봤기 때문에 오히려 목회하기가 쉬웠다. 먹고사는 문제가 별거 아니고, 가치 있는 일인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현재도 아버지가 받으시는 페이보다 준전임으로 있는 내 페이가 많다.

허유빈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부부교사여서 바쁘셨는데 우리를 돌보시려고 외할머니가 오셨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때 교회를 시작하셨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외할머니께서 치매가 와서 5학년 때부터 학교에 갔다 오면 할머니 수발을 들어야 했다. 벽에 묻어 있는 배설물을 닦고 이불을 빨고, 몸을 씻기고, 식사를 차려드리고. 그런데 사춘기 시절에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교회에 계시고, 어머니는 일하시고, 4살 차이 나는 사춘기 형은 집에 없었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아버지가 신대원에 들어가셨는데 내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뒷모습이다. 슬픈 뒷모습이라기보다 역사 교사여서 잘 가르치고자 항상 책을 가까이 하시고 목회자가 되시고는 아침마다 항상 큐티하는 모습, 교회 사무실에 가면 설교 준비하시는 뒷모습, 교회에서 기도 할 때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뒷모습. 내가 목회의 길을 결정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이고, 초라해보였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에는 그 뒷모습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자리를 떠나서 어디서든 간에 아버지는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셨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병문안을 가거나 어디를 가도 성경책과 설교를 위한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니셨다. 목회자의 길을 걷고 난 이후에 아버지의 뒷모습은 크고, 위대하고 따라가고 싶은 모습이었다.

 

-사모였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가?

허유빈 가장 불쌍한 존재였다. 어릴 때 기억에 아버지는 월요일에 일어나면 안계시고 토요일에 오셨다. 어머니는 사모로, 딸로, 어머니로 사셨다. 내가 보기엔 어머니가 가장 불쌍한 존재였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고 얘기하셨다. 가장 대단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목회자로서 존경하고 어머니는 신앙인으로 가장 존경하는 존재다.

김신약 어머니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우리 동네에는 우리 교회 밖에 없어서 사모로만 불렸다. 고향이 서울인데 제주도에서 외로우셨을 것 같다. 아버지는 그래도 자신의 삶을 사시면서 적어도 김관진 목사라 불리지만, 어머니는 교회에서는 부교역자 역할을 하시면서 집에서는 가장 역할, 평생 사모로 불렸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재능이 더 많으시다. 공부를 하셨어야 했다. 어머니의 삶은 기가 막히다.

박병도 사모지만 관리집사였다. 교회 모든 청소와 전구 다는 것을 다 하시는 분이었다. 신기한게 어머니가 신앙의 1대인데 목회자를 배우자로 맞겠다고 서원을 하고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늘 묵묵히 사모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었다. 주례하신 목사님이 목회자는 말씀 준비해야 되니 다른 것은 어머니보고 다 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어머니가 “아멘”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아빠보다 엄마가 전구를 더 잘 가신다. 전형적인 사모상이다.

 

-왜 목회자가 됐나? 목회자가 될 때 가장 큰 고민은?

박명수 목사(보은 원남교회)와 손자 박윤우, 박병도 목사

박병도 어릴 때는 마냥 아빠 직업이어서, 아빠가 전도사일 때 나도 전도사, 목사일 때 나도 목사가 되고 싶었다. 사춘기에 다른 걸 할까 생각도 했지만 항상 목회자가 순위 안에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에 긍정이 더 컸다. 삶이 힘들었지만 사춘기 지나면서 먹고사는 것의 문제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한번도 고민하지 않았다. 학부를 대전에 한남대에서 기독교학과를 나왔는데, 신학을 배우면서 계몽하는 느낌을 받았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학을 경험하면서 너무 좋은 거구나 느끼고 이것을 나눠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선한 영향력으로 누군가와 공유하는 목사로 살고 싶었다. 제일 고민 되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대학 갈 때만 해도 80만원이라는 부모님의 사례비에서 대학등록금이 나왔다. 어머니가 초인이셨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든 되겠구나 경험을 해서 크게 어렵지 않았다.

허유빈 난 주구장창 목회를 반대했다. 20살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확신을 가졌는데 목회는 반대했다. 이렇게 사는게 싫었다. 상가교회 목회자로 사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26살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힘들어하셔서 아버지한테 “이정도 고생 했으면 됐지, 그만합시다”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가 “의사는 의술로 사람을 고치지만 목회자는 성도 한 사람의 마음을 고치면 그가 의사로 살 수 있다. 아직도 나에게는 그 한 명의 성도가 남아있지 않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목회자로 살아야 겠다 생각했다. 일반대학 경영학과 나와서 돈 잘 버는 회사 들어가서 살아야지 했는데 아버지의 그 말씀이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목회자의 길을 결정했지만 내 안의 걱정은 ‘나 같은 사람도 목회를 할 수 있나? 나는 감정 기복도 심하고 말도 거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삶이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나?’ 였다. 그런데 살고 있다. 어머니가 반대하셨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목회자가 될거면 수요예배, 금요예배, 새벽예배 나와야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때 훈련이 됐다.

김신약 초등학교 4학년, 그때쯤 교회 꽂혀 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 전기를 읽고 ‘멋있다. 선교사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당연히 신학을 하고 인도 선교를 꿈꾸고 제대 후 인도도 갔다오고 준비했다.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대신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할까’ 고민한다. 재정적인 문제는 것은 가져 본적이 없어서 안한다. 어릴 때부터 반찬이 없으면 케첩으로 밥 비벼먹고 그래서 없으면 ‘그때처럼 살지’ 라는 생각이 있다. 10년 전에 알바해서 번 돈이 전도사하고 목사 때보다 더 많이 벌었다. 돈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살겠지’라는 마음이 있다. 목회자가 되기 전까지 구멍가게 사장이 꿈이었기 때문에 목회자가 된다고 했을 때 지지를 많이 받았다.

 

-목회자가 되고나니 어땠나? 현재 가장 큰 어려움은?

박병도 태어나서는 담임목회하는 아버지를 봤는데 저는 부교역자를 하고 있다. 그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그때는 교회 옆에 사택이 있었는데 교회랑 다른 곳에 살면서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것이나, 시골 목회하는 아버지의 성도와 교제하는 모습과 어느 조직의 일부를 담당하는, 대형교회의 경험이 다르다보니 물음표가 많다. 목사는 같은데 상황이 달라서 새로운 그림이다. 서울에서 목회를 하려면 ‘삯꾼이 되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좋게 말하면 단련되고 깍여 나가는 부분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목회자를 보면서 삯꾼이라고 욕했는데 '나도 그래야 살아남겠구나' 생각이 든다.

김신약 목사로서 경험한 목회는 아버지 세대보다 누리는 게 많다는 것이다. 물론 힘들고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선택권이 없없지만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조언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선택권이 없으셨다. 그리고 사역들이 즐겁다. 지체들과 교제하고 만나는 것이 재밌고, 많이 배웠다. 목회가 행복한거구나 생각한다. 하지만 어려운 일로 찾아온 이들과 상담하면서 무기력함을 느낄 때도 있다. 절망 가운데 같이 서야 됐을 때 가슴이 먹먹하다.

허유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제약이 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 교회 안에서 사람을 섬기고 성도를 감싸주고 목양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어서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주안장로교회에서 중학생들을 담당하고 있는데 사춘기 아이들이라 감정 표현도 못하고 시크한데, 마음 문을 열지 않았던 아이들이 1년 과정 동안 심방하고 품어줬을 때, 이 아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오고, 목사에게 고맙다고 할 때,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 행복하다.

교회란 무엇인가 답을 찾기 위해

시작된 골목교회,

그 과정 속에 만난 귀한 교회들

-골목교회는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떻게 제작되나?

허동길 목사(부산 충은교회)와 허유빈 목사

허유빈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울분도, 의문도 있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란 무엇인가 찾아다녀보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채널을 ‘골목교회’라고 개설하고, 작년 8월부터 찾아다니게 됐다. 골목교회 자녀로 살았으니까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작은 교회인 상가교회나 시골교회나 단절감이 상당한데 그것을 연결을 해보고 싶었다.

첫 번째 교회는 같이 했던 전도사님이 소개해줬고. 그 이후로는 온라인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다 찾아보고, 전화를 해봤다. 처음엔 거절하는 분도 있고, “목사 맞냐? 어느 학교 나왔냐? 프로필 보내봐라”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데 10번째 교회가 올라가고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추천도 들어오고 전보다 수월하게 섭외를 하고 있다.  기준은 출석 성도수 150명 미만으로 언론에 한번도 소개되지 않은 교회를 찾는다. 영락농인교회만 상징적이기 때문에 예외였다.

김신약 3명이 신대원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다. 나는 따로 유튜브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치관이 같아서 함께 하게 됐다. 교회 규모나 재정 상태, 지역 출신 상관없이 동일한 목회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대접받는 목사고, 누군가는 지원받는 목사라는 상하관념이 생기는 게 옳지 않아보였다. 개인적으로 역사신학을 전공했는데, 그래서 작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지 않아도, 특별한 대부흥이 있지 않아도 모든 교회는 가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고, 모든 교회는 나름대로 사역이 있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찾고 있었는데, 두 분은 현재에서 찾고 있었다.

모두가 동의할 때 취재를 간다. 시청률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만 마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150명 미만이라는 기준을 뒀다. 우리 스스로 기준이 잡혔을 때, 제약없이 교회들을 찾아갈 것이다.

박병도 같은 고민에서 시작됐다. 교회는 뭘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서 교회는 뭔데? 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물리적인 시간이 안되다 뒤늦게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고, 내가 편집을 할 수 있어서 같이 하게 됐다.

 

-교회 사역도 바쁠텐데, 주위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허유빈 처음엔 아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자가 성도의 절반이었던 교회를 취재하고 집에 왔는데 제 눈빛이 너무 살아 있었다더라. 오랜만에 ‘교회란 이런 곳이야’라는 마음이 들었었다. 내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오히려 후원해줬다. 그 이후로 아내가 짐벌이라는 카메라도 사줬다.

박병도 아내도 같이 신학을 했기 때문에 다들 아는 사이다. 육아나 논문 같은 것들을 위해 참여하지 못하다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물었더니, “다른 것은 핑계대면서 미루더니 그것은 하고 싶냐”며 허락해줬다. 평소에 아이들과 더 많이 놀아주고 밤에 작업을 한다.

김신약 다행히 다들 풀타임이 아니어서 할 수 있었다.

 

-골목교회를 시작하면서 들었던 고민들, 교회란 무엇인가, 해소가 됐나?

허유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골목교회를 시작할 때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작했지만 사실 교회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골목교회를 해나가면서 ‘한국교회에 답이 있구나,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구나’ 느낀다.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통해 얻은 목회와 교회에 대해서 얘기해주시면?

김신약 목회든 교회든 시대와 세상과 소통하고 대응해야 한다. 목회나 교회에 답이 없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목회, 성공한 교회, 존경받는 목사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모든 목회자가 현장에서 살아가면서 나름의 역할을 취하면서 모든 목회나 교회가 다 답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신학 할 때는 좋은 교회 좋은 목회라는 정답과 같은 코스가 정해져 있었지만, 사회가 다양해지고 시민단체가 많아지고 소수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도 어느 한 기득권을 가진 대형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국교회의 대표가 될 수 있는 그런 목회,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서로 연합하고 연계하고 공존하고 동역할 수 있는 그런 목회와 교회를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라는 것은 잘 나갈 때는 연합할 수 없다. 선교 초기에는 같이 연합했다. 그런데 너무 많은 힘을 가졌을 때 연합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인구보다 교회 성도가 더 줄어들고, 교회 위기가 오고 더 파편화 될 텐데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해서 연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연합할 그때를 위해 자료를 쌓아놓자고 했다. 그런 시대가 되었을 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허유빈 같은 사역을 하는 교회들끼리 연결이 되는 것을 봤다. 교회간의 연결이라고 하면 오프라인을 생각하는데,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 가운데 온라인 연결이 사역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목회자간의 연대가 가능해진 시대라고 생각한다. 골목교회가 중재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카이브다. 교회 간 교회간의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박병도 교회와 유튜브를 시청한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은 긍정적이다. 아직 20개 교회라 교회끼리의 연결은 더 지켜봐야 된다.

 

-꿈꾸는 교회가 있다면?

김신약 인터뷰할 때 많이 듣는 말인데, 교회는 사람이다. 조금 더 구체화되면 사람이 목적이 되는 거지 사람이 수단이 되지 않는 공간. 건축이나 전도를 위해서 집단 공동체 수단이 되어서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목적이 되어 서로 얼굴을 알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

박병도 자신의 실패와 허점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이길 바란다. 교회 내에서 간증이라는 게 세상에서 기준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서는 자리다. 그 안에 고통과 아픔은 못 나누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도 같이 있고 응원하고 위로해주고 나눌 있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골목교회가 세상의 기준에서 실패한 것 같은 작은 교회를 가치있고 의미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건강한 교회라고 응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허유빈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 목회자도 성도도 살아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병도 감사하다. 이 자리에 온거나 이런 고민을 하게 반석이 되어주셔서. 이 길을 걷는데 가장 든든한 응원자이자 선배여서 감사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금수저다.

김신약 아버지의 신학과 많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생각하는 모든 것은 결국 아버지의 삶에서 배운 것이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삶이 그런 삶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버지의 목회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셨다.

허유빈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다. 저에게 있어 한 생명의 가치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더 빨리 아버지의 값진 삶을 알아채지 못해서 죄송하고,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 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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