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44] 황해도 교회사 9
[북한교회사44] 황해도 교회사 9
  • 황기식 목사
  • 승인 2020.05.15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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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목사와 구월산 유격대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3일 새벽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응선(청풍김씨)씨와 어질고 현숙한 어머니 전익선씨 사이에 독자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안악골은 양산대의 산 준령이 대원면 평촌리 마을 마치 비둘기 날개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었으며 수려한 산세와 빽빽한 소나무 숲이 마을을 평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자연 환경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익두는 안악골 기름진 땅의 제일가는 부자집에서 태어나 부모와 일가친척의 귀염둥이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김익두가 태어난 평촌리 마을은 앞이 탁 트인 천리평야가 시원하게 열려있고, 구월산 폭포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물이 안악강의 물줄기를 타고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유유히 흘러 황해바다(서해바다)를 향하여 끝없이 뻗어 나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므로 산 좋고 물 맑은 안악 평야는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풍성하여 살기 좋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유난히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부자집이 김익두 집안이었으므로 이런 좋은 환경에서 김익두는 아무런 구해됨이 없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성장했다.

김익두의 부친 김응선씨는 한학자의 전통적 가문에 걸맞는 한학에 능통한 선비로서, 풍채가 늠름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호걸풍의 부자이어서, 안악일대에서는 소문난 사람이었다. 이따금씩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기를 잘 했고, 의지할데 없는 노인들이나 과부들을 불쌍히 여겨 양식을 나눠주기를 잘 하며 부모 잃은 고아들을 찾아 남모르게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후일에 김익두 목사의 인정이 넘치고 사랑이 많은 목회자로서의 정직하고 곧은 성품은 아버지 김응선씨로부터 받은 유전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의 독자였기 때문에 김익두는 여섯 살 되던 해 1880년에 동네 서당에 입학하여 천자문을 떼고 명심보감, 소학, 대학을 탐독했고 10년간의 면학 끝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여 당대의 학문인 유학에 정통한 선비가 됐다. 한학의 선비가정에서 철저하고 보수적인 유교교육을 심도있게 받은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효심이 두터웠다.

김익두는 과거를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아버지는 큰 기대를 걸었으나 낙심되어 병을 얻게 되어 그만 운명하게 되었다. 그때 김익두에게 유언을 남겼다. “사람이 사람의 탈을 썼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니 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다오”라고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김익두는 통곡하며 아버지 장례를 잘 치뤘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김익두는 인생 무상함을 깨닫고 입산수도하여 도를 닦다가 불교의 윤회설에 실망하여 다시 산사(山寺)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김익두는 장사를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어서 장가를 가게 되었다. 이웃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김익진이란 여자였다. 김익진씨는 1876년 6월2일생이었고, 김익두 목사보다 2살 아래였다. 김익두 목사는 18세였고 김익진씨는 16세였다.

김익진씨는 1944년 11월6일 별세했다.

이분이 한국의 펠로로 유명하던 할렐루야 축구팀의 부장 김용식씨의 생모가 되신분이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잘 아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여 많은 돈을 날려 버렸다. 그래서 그는 화를 삼키며 매일 술로 탕진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시장에가서 상인들을 폭행하며 깡패가 되어 식당에 들어가서 무전취식, 무위도식하며 상인들과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폭행하고 시비를 걸며 난폭한 생활을 하며 망나니 김익두의 삶이었다.

상인들은 김익두를 보고 오늘 장사하는 날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김익두는 그렇게 망나니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항상 그의 마음속에서 정의와 사랑, 긍휼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안악 장터에서 스왈론(W.L.Swallen)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게 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한 후 말씀 읽는 생활에 빠져 100번의 성경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스왈론 선교사의 조사로서 활동하며 첫 사역지가 신천군 신천읍 신천읍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28세에 재령읍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신천읍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 스왈론 선교사 추천으로 1906년 평양신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1910년 평양신학 3기생으로 5년간 훈련을 받고 졸업했다. 평양신학 3기생은 모두 27명이 졸업했다.

황기식 목사<br>​​​​​​​총회역사전문위원<br>아산동산교회담임목사 
황기식 목사
총회역사전문위원
아산동산교회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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