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주일과 성전에 관하여
[기획특집]주일과 성전에 관하여
  • 주승중 목사
  • 승인 2020.03.0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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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설교는 코로나19로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주일 예배 성수에 대하여 함께 기도하고자 싣습니다.

주승중 목사 (주안장로교회 위임목사/가스펠투데이 이사장)

본문 막 3:1-6, 고전 3:16, 고후 6:16

 

1. 들어가는 말: 예배당에서의 주일 예배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 역사상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이 아니라 가정에서 또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님들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진실로 모이기에 힘쓰고, 모이면 예배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과 유산을 지닌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작금의 상황은 정말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상황아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순간에도 한국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네, 맞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중에도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내용을 볼 때 완전한 진실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1938년 9월 장로교회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모든 공교회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결정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미국 UCLA의 교회사학자인 옥성득 교수는 “사실 바른 의미에서 주일성수는 1939년에 무너졌다”고 지적합니다. 이후 조선의 모든 교회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매 예배 때마다 궁성요배, 순국장병에 대한 묵도, 그리고 황국신민서사(일제가 국민정신 함양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맹세)를 한 후에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먼저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많은 개인과 공동체는 혼자서 혹은 숨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개인들의 예배는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되었지만, 한국교회의 공예배는 1939년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객관적인 역사입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도 예배를 멈추지 않았다는 말은 형식적으로는 맞는 말일수도 있으나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그 본래의 의미로는 바른 말이 아닙니다. 이는 한국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왜 설교의 시작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 모이는 것을 중단하고 영상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에 대해 일부 성도들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전염병이 무서워 교회에 모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듣고 보는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과 질문을 품고 계실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회 전체의 역사를 보면 어떨까요?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했던 15-16세기는 유럽에서 ‘페스트’라고 불리는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입니다. 그때 교회는 어떻게 하였는지 소개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장신대 교회사 교수인 박경수 교수는 「흑사병과 종교개혁자들」이라는 글에서 종교개혁가 루터의 흑사병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였습니다. 1527년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썼습니다. 당시 전염병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 병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치료약의 사용도 반대했고,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이나 장소를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분명히 말합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저절로 나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루터가 하는 권면의 말씀은 꼭 오늘 이 시대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약을 먹으라.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라. 사람과 장소를 구별하라...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다. 약을 조제하여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 불청결로 이웃이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아멘, 저는 루터의 이 고백이야말로 오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모든 믿는 자들의 고백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많은 한국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모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거나 전염병을 과도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 저희는 모일테니 하나님께서 저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성도님들과 이웃들을 향해 내린 신앙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문제인 ‘주일성수’와 주일성수를 위한 장소인 ‘성전’에 대한 고민들을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들과 관련하여 그 누구에게 보다도 예수님께로부터 그 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2. 본문의 배경: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안식일 논쟁 과정 가운데 일어난 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이 회당은 아마도 가버나움의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막 2장 23-28에 소개되어 있듯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문제 삼고,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냐?”(막 2:24)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다윗과 그의 수하들이 시장할 때에 제사장의 진설병을 먹은 것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막 2:27)을 지적하셨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막 2:28)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바리새인들은 다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실 때, 예수가 또 안식일을 범하는지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2절 말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하여 주시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으로 보아 손 마른 사람을 회당에 데려온 것은 그들이 파놓은 함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을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의사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오른 손”이 마른 상태였습니다(눅 6:6). “마르다”는 단어는 신체의 일부가 굳어지는 상태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는 중풍병으로 그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학자 바클레이는 초대교회 문서를 인용하면서 이 사람은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께 나와 이렇게 호소했다고 합니다. “예수여 나는 손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석공입니다. 청컨대 나의 손을 건강케 회복시켜 주시사 나에게 음식을 빌어먹는 수치를 면케 해 주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자신에게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에 의하면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만 안식일의 법이 면제된다”고 규정되어 있었고,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의 경우는 당장 생명에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안식일이 지날 동안 기다린다고 해서 병이 악화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작심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이런 유명한 도전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이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면,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악”이라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고,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막 3:6).

3.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공격하였을 때에도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죄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7-8)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라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규칙과 전통을 지키거나 제사를 얼마나 절차에 맞게 드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자비와 긍휼을 행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이런 근본정신을 무시한 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전통과 형식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구약성경에 의하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시고, 그 쉼의 날에 우리를 초청해 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출 20:11). 그리고 더 나아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신 5:14-15)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모든 창조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안식에의 초대에 동참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의 자비를 본받아 이 땅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려는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등의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4.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

그리고 구약시대부터 지켜지던 이 안식일은 우리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변화되었고, 우리는 지금 구약의 안식일이 아닌 주님의 부활의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참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케 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새로운 창조사역과 구속사역을 이루신 “주님의 날”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출애굽의 구속사역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었듯이, 신약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새창조(New Creation)와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이어지며,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의 재창조와 구속사역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적인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주일에 선을 행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은 “고장 나고 병든 세상을 고쳐 다시 한 번 생명이 충만한 세상... 즉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려는 예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병자들을 치유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등의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회의 예배모범인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주일성수에 대하여 “신성한 주님의 날에는 ...은혜로운 주일 예배를 위하여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기도하고...예배를 마치고 남은 시간에는 독서와 명상과 설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복습”하는 가운데 쉬어야 하고, 더 나아가 “병든 자의 심방과 자비의 손길을 펼치는데 함께 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주일의 기본정신과 가정에서의 영상예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렇게 안식일의 기본정신과 또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교회들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인터넷과 영상을 통해 가정에서 또는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이 비상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의문들과 비판이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이런 식으로 드려도 되는가?”, “바이러스가 돈다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주일 예배를 유보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게 대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대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기도 하셨고, 또 많은 병자들을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항의하듯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마 12:11) 질문하셨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고 그런 일들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예배),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있다(이웃사랑)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바로 성경전체의 요약이기도 합니다(마 22:37-40).

그러므로 영남신학대학의 김동권교수가 「온라인 주일 예배에 대해」라는 짧은 글에서 바르게 지적하였듯이 오늘 한국교회가 온 회중이 함께 교회에서 모이는 “대중(주일)예배를 잠시 유보하는 것이 이웃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확하게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대구지역 신천지 이단들의 경우를 통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고 있듯이 대중집회가 바이러스를 확산하는 “슈퍼 전파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주일예배나 혹은 유사한 형태의 대중집회가 또 다른 “슈퍼 전파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주일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주일예배와 대중집회를 강행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전통과 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바리새인의 의를 추구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주일예배를 고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듯이, 우리가 진정 우리의 이웃과 한국사회 전체를 생각하고(교회의 공공성), 생명을 무엇보다 존중한다면, 우리의 신앙(예배)형식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우리의 것을 희생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만(히 10:25), 그러나 세상을 섬김으로 치유하고, 생명을 살려야 할 교회는 진실로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영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비록 정상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주일(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지 못함을 너무 힘들어 하지 마십시오. 죄책감은 더욱 더 가지지 마십시오. 이것은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성도들과 만나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에 모여 주님의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불과 2주전까지의 평범했던 주일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주일의 모습들이, 그래서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지나쳤던 그 일상들이 주님 앞에 얼마나 회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모이지 못하는 이 시간 서로를 깊이 그리워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매주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기를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주일예배와 예배당의 관계

이제 마지막으로 주일예배와 예배당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바울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27).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건물인 성전에 임재하셨습니다. 그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서 당신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기에 성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는 더 이상 건물로 지어진 성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시는 각 성도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므로, 우리 각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로 건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모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구별된 장소라는 개념에서는 성전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구약적인 의미에서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성전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는 바로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교회란 택함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공동체(commuinio sanctorum)”라고 한 것이고, 종교개혁가 칼빈과 루터도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자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한 마디로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장소나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자, 교회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모인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성전인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한시적으로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가 함께 모여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함께 임재하시고 성전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복음시대에는 기도나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이 예배가 행해지는 어떤 장소나 예배를 향하는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또 그것 때문에 예배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총회」의 헌법 제 4편 『예배와 예식』에는 “하나님은 일정장소에 국한되어 예배를 받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내용들을 보면, 『특강 예배모범』의 저자인 손재익 목사의 지적대로, 결국 핵심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바로 공동체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혹은 예배당에서든 함께 모여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에 임재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7. 나가는 말: 성전 된 우리 각자의 신앙을 회복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일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며, 또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를 만나 많은 생명을 살리고, 우리의 이웃과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주일예배를 교회에 모여 드리는 것을 내려놓고 가정에서 또는 영상을 통해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주일예배를 포기하거나 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의 이런 예배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항상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우리의 영혼의 안식과 참된 영적 양식을 공급받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성별된 장소인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기본이고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본원칙을 꼭 명심하되, 여러분들이 지금 어디에 계시든(가정이든, 구역식구들 모임이든, 일터이든) 한시적으로 드리는 (영상) 예배를 통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큰 두려움과 어려움에 빠져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중보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동안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음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예배의 회복도 이루십시오. 더 나아가 교회의 대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이번 이 고통과 시련의 기간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주일성수와 성전 된 나(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참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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