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빛을 가슴에 품고 소금이 되어 도전하라
그리스도의 빛을 가슴에 품고 소금이 되어 도전하라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0.02.0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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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13-20

2020년 2월 9일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마태복음 5장13-20

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 13-4절에서 예수는 두 가지 은유를 사용하여 제자란 어떤 사람이며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첫 번째 은유는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13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위해 사용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주어진 능력은, 마 5:3-10에서 묘사된 방식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크고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한다. 제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 자를 세워주고, 상실감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정직하게 행하며, 평화를 도모하고,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면서 사회의 현 상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이 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는 제자는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두 번째 은유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14-16절). 이 은유는 제자들의 공동체적인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게 한다. 빛은 일종의 에너지로서 사물에 다양한 색깔을 주고, 식물을 성장하게 하고, 태양광발전을 통해 전기를 만든다. 또한, 특별한 처리를 통해 레이저 광선과 같이 유용하게 이용된다. 제자 공동체는 모든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빛을 굴절시키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제자들이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참여할 때 그들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17-20절에서 확인되듯이, 제자들이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온 것이라고 밝힘으로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겠다는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예수는 이 과정에서 전통을 부인하거나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주신 사명을 확장한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한다.

나아가 20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정의를 위한 열정이 없고,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에게 확장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파기한 것이다. 언약적 관계가 깨질 때, 그들의 미래에 하나님은 없다 -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b)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방식을 본받아 오늘날 의롭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태는 분명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 생겨 난 기독교공동체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산상설교로 알려진 설교를 예수께서 했을 때 그 청중은 이스라엘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예수의 설교는 일반적인 윤리적 규범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고, 당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뜨거운 논쟁에 개입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 논쟁의 발단이 되었던 직접적인 정황은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땅을 점령한 일이다.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방 제국에 종속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몸은 돌아왔지만, 포로생활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땅과 도시 그리고 성전은 이방나라가 지배하고, 온 나라에 군인들이 활보하며 하나님의 왕권이 이루어지리라는 예언자적 약속은 여전히 먼 훗날의 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와 성전이 어떻게 정복당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기를 원하실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1세기 유대교의 여러 분파들은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정복자와 현실적으로 협력했던 사두개파부터, 무기를 들고 제국과 투쟁했던 젤롯당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대체로 후자 편이었다. 하지만 예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어떤 파들은 칼을 선택했지만, 다른 그룹은 대신 다른 삶을 선택했다. 즉 그들은 작은 유대나라가 제국의 광대한 군사적 힘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개인적 율법연구와 실천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만일 정치적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최소한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문들과 난무하는 대응책들로 인해 분열되고 혼란스러워 하는 백성들에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에 도전을 가져다주는 설교를 하셨다. 예수는 한편으로는 젤롯당의 방식을 거부하여 원수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저항하지 말고 위해 기도하라(마5:43-44)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의 전략도 또한 헛된 것이라며, 사람의 의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5:20)라고 하였다. 이 본문에 대한 설교자나 주석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께서 비판한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의 핵심은 율법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5:18). 바리새파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가 미래에 있다는 가정 하에 일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말하자면 포로생활 또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은둔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는데(마4:23),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새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동경위에 놓아두어 온 집안에 환하게 해야 한다(마5:15).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이나 예언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율법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다른 관점에서 읽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죄가 지배하는 세계의 맥락에서 읽는다. 예수는 더 이상 율법을 죄의 맥락에서 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읽는다.

목회적 관점

팔복을 선포한 후에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소금과 빛처럼 되어야 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밋밋한 인간관계에 ‘맛’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소금의 이미지를 현실적 목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두 가지 유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지난 30년 동안 목회자와 평신도 전문가들이 진행한 목회 사역은 소위 치유 사역으로 인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로 인한 한 가지 결과는 목회 사역이 상황에 관계없이 무조건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개개인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또 그 사람의 행동에 도전을 주기도 했다. 예수는 부유한 청년을 받아들이셨지만, 그의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도전을 주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받아들이셨지만, 나아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은 상황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존엄성을 견고하게 하는 반면, 도전은 그 사람에게 더 나은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효과적인 목회 사역을 위해서는 인정과 도전 두 가지 대응이 모두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변화를 향해 도전하게 하는 것은 영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짠맛이다. 목회자의 지팡이에는 두 개의 끝이 있다고 한다. 사람을 양무리와 가까이 있도록 붙잡는 고리와(지원), 자극하고 격려하기 위한 뾰족한 끝(도전)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의 빛이며, 이 빛은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을 우리의 은사와 재능을 은유적으로 표현된 양동이 속에 감춰두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공동기도서에서 선호하는 봉헌문 가운데 하나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빛을 비추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삶 가운데 안팎으로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어둡고 깨어진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신다. 이 빛은 복음의 빛이고 모든 사람들을 그 온기와 광채로 나아오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가슴에 품고 그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한다. 빛은 우리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게 아니다.

목회자는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을 보기위해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필수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 어디에 비추어져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없다. 목회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두운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어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어둠을 살피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설교적 관점

오늘 본문은 삶에 있어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이나 교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마태공동체의 상황은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마태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뒤따르는 신학적, 사회적 갈등 속에 살았다. 당시 유대사회는 유대교의 미래와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설교자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설교자는 마태복음 5:13-16을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신학적 전거로 사용할 수 있다. 마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3절a)라고 시작한다. 유대교에서 소금은 언약을 상징한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종말적 시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마태에게 있어 언약공동체는 그래서 종말적 공동체를 뜻한다.

언약이라는 주제는 5:14-16에서 더 강조되는데, 여기서 복음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할을 서술한 이사야 42:6로부터 ‘너희는 세상의 빛’ 이라는 표현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이방인)의 빛이 되도록 부르셨다.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사 42:1-6, 창12:1-3) 이와 마찬가지로 마태공동체는 1세기에 빛의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교회는 사회에서 그러한 빛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가치 있는 삶이나 양식을 실제로 보여주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덕목으로만 이해하고 있는지 도전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공동체가 그 빛을 어떻게 비출 것인가? 선한 일 곧 (16절) 즉 사랑, 자비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의 언약을 이행하는 실천을 통해서다. 설교자는 빛을 비추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고 그 나라를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추는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17-20절은 나아가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 공동체는 그 나라를 기대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마태는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예수나 예수를 추종했던 초기공동체가 율법과 유대교를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다. 확실히 마태는 율법(즉 바리새파) 몇 가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교회 내의 유대인 교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이방인 교인들도 율법의 핵심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입장이 17절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율법과 예언자를 완전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했던 바를 공동체의 일상적 삶에서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고 마태는 18절에서 그 직접적인 근거를 말한다.

설교자는 19절을 교인들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20절에 나타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한다는 이 본문을 보면 마태공동체와 몇몇 전통적 바리새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교자는 율법의 어느 부분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5:17-20은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설교재료가 될 수있다. 그러면서도 이 본문은 교인들이 율법,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그리고 예언과 성취라는 주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도와주는 설교에도 도움을 준다.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 제공(cafe.daum.net/ser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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