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는 장연군 소래교회가 세워진 후 도서지방으로 복음을 확산 시키지 않고, 황해도 내륙지방으로 선교를 확산하였기에 도서지방 장로교회는 교세가 약하고 내륙지방은 장로교 교세가 감리교보다 더 우세하였다.
옹진군 도서지방 전도를 위한 내리교회의 매서인 4명을 특별히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하춘택은 어떤 매서인인가?
하춘택은 영종도 출신이며, 존스 선교사의 매서인이었다. 그는 자기 동생 하성택과 함께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동안 고향 영종도에 와서 정종후, 문명현, 박공서, 전동호 등과 함께 영종도에 복음을 전하며, 영종도 교회를 세웠다.
1899년 권사로 추대되어 황해도 연안교회에서 전임 시무하였고, 1903년 강화 남구역 본처 전도사 2년급으로 진급하면서 해주교회 전임으로 시무하였고, 1905년 강화 남구역 1908년 고향인 영종도교회 교역자가 되었다가 말년에 은퇴하였다.
둘째, 매서인 김군선이다.
1901년 존스 선교사의 매서인이다.
그는 덕적도를 순회하며 전도한 결과 백운기, 허광모, 오준원, 김창성 등 4명을 개종자로 얻어 덕적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덕적도에 6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셋째, 존스의 선교사 매서인 이승환이다.
그는 강화도 출신이었으나, 내리교회 출석 계삭회 회원으로 전도하다가 계삭회가 해체됨으로서 존스 선교사의 명을 받아 고향 강화도로 돌아와서 시루미교회를 세웠고, 강화도에 감리교회를 전파하여 확장시켰으며 교동도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여 교동교회를 세운자이다.
넷째, 존스 선교사의 매서인 이동휘이다.
매서인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다.(1872-1935)
8세 때부터 향리 대성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세 때에 지방 관장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와서 이용익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을 지냈다.
1907년 7월 한일 신협약으로 한국군이 해에될 당시까지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었다. 이 때 내리교회에 참석하여 존스 선교사와 만남을 통해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의 매서인이 되었다. 이동휘는 옹진군 북도에 가서도 1901년 신광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했으나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그 후 서울에 있는 벙커 선교사(감리교)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와 이동녕등과 신민회를 조직했고, 1911년 윤치호, 양기탁과 105인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08년 유진오, 오상규 박사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조직 했으나, 1915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도 전도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동휘는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조선의 백만 명의 기독교인을 주신다면 독립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