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르심 ; 모험으로의 부름, 그리고 오늘 우리의 행동
예수의 부르심 ; 모험으로의 부름, 그리고 오늘 우리의 행동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0.01.2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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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 12절~23절

성서정과에 따른 복음서 본문을 4가지 관점(신학적/주석적/목회적/설교적)으로 정리한 글을 매월 한주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2020년 1월 26일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마태복음 4장 12절~23절

신학적 관점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은 평주일(Ordinary Time) 세 번째 주일이기도 하다. 평주일이란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이 특별한 절기와 직접 연관되지 않은 교회력 기간을 말한다. 평주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상적인 기간이다. 우선 평주일은 그것이 주현절,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과 같은 특별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이다. 이 기간은 교회가 직접적으로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을 기념하거나 이를 준비하는 기간은 아니다. 이 기간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기간이다. 신비스런 별의 출현이나,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왕의 탄생을 경배할 기대 등에 의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나를 따라오너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기간이다.

평주일의 첫 부분이 되기도 하며 주현절 이후 주일로 지키는 이 기간은 신학적으로 볼 때 대림절을 통해 기대하고 성탄절을 통해 축하했던 성육신의 의미를 더 깊게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아기 예수 탄생의 측면에 너무 집중할 때 성탄은 성육신의 진정한 경이를 모호하게 할 위험이 있다. 성육신의 경이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현재(顯在,manifest)하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핵심이다.

동방교회 주현절의 원래 전통에서는 예수의 탄생, 세례, 기적 등의 주제를 주현절 한 날에 모두 포함함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신학적 준비를 하였다. 개신교에서 주현절 기간을 특별한 절기로 취급하는 것은 동방교회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신학적 통찰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주현절을 기념함으로 예수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 기간이 평주일의 첫 부분이라는 사실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면, 도미니칸 신학자 맥카베 (Herbert McCabe)는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기 위해 역사적인 탐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고, 그분은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그분과의 교감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특별한 실존적 차원을 바라보게 된다... 바로 예수라는 인격과의 접촉을 통해서, 예수라는 인격과 우리의 인격 사이의 인격적인 소통을 통해서 그의 인성 안에서 그의 신성이 계시된다”고 말했다.

평주일이기도 하고 주현절 기간이기도 한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예수를 따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명령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를 듣는다. 신비한 별이 보이지 않고, 지진과 같은 것도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음성이 우리의 귓전을 울릴 뿐이다.

주석적 관점

본문 처음에서 우리는 예수의 선포의 시작이 요한의 공적 활동이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 시작됨을 알 수 있다. 12절에서 마태는 세례요한이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NRSV에서 체포라고 번역한 헬라어 paradiadomi는 일반적으로 다른 데에서는 “넘겨주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마태는 끊임없이 예수의 고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단지 단순한 체포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향한 의도적 행진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17:22;20:18;26:2). 마태는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는 장면을 분사형으로 묘사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6:25,46,48;27:3). 결론적으로 마태는 예수의 사역이 요한의 사역과는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한의 체포(넘겨줌)는 예수의 초기 사역이 무슨 목적으로 진행되는가를 조용히 예고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와 사역을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요한의 체포 이후에 마태는 독특하게 예수가 나사렛에서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계속해서 이것을 예언의 성취로(사9:1-2을 마4:15-16에서 인용) 기록하며 그가 쓴 복음서의 앞의 장들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16절)는 앗시리아에 유배당한 자를 말한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었다. 예수의 움직임과 함께 이제는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받게 되었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전 세계가 예수 안에서 빛을 받게 되었다.

마태는 예수에 의한(17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하나님나라 메시지-요한의 선언과 비슷하고 그것을 확장한-를 선언함으로써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의 시작을 시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안내하는 것이 예수가 온 목적이다. 예수가 이 땅에 죽으러 왔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고, 보다 더 정확하게는 먼저 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들을 그곳으로 초청하며 살도록 요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다. 비록 일부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서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으로 직접 넘어가지만, 그가 산 이유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예수의 죽음은 그가 살았고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 대한 마태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제자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18-22).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묘사된다. 요한은 전체적으로 충분히 설명해 주고(1:35-51), 누가는 제자들의 부르심의 이야기의 일부로 기적적인 고기잡이(5:1-11)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마가는 짧게 설명하면서 단순히 예수가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면서 시몬, 야고보, 요한을 부른 것으로 기록한다(1:16-20).

마태의 설명은 마가와 같이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시기 전에 한 예비적 일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주석가 더글라스 헤어(Douglas Hare)가 지적했듯이 “여기에서 부르심의 이야기는 최소한의 요소들만으로 축약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로 부르시고, 제자들은 이에 대해 철저한 복종으로 응답한 것이다.” 마태가 장래 제자들의 복종에 대한 묘사가 급진적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그들은 ‘즉시”(20,22) 따랐는데 자격을 따지지도 않았고 어떤 질문도 없었다. 둘째로, 그들은 수익이 좋은 어부의 직업을 예수를 따르기 위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그리고 ‘더 좋은 자리’로 올라갈지에 대한 약속도 없다. 마지막으로, 명백하게 서술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가족을 떠났다는 것이 또한 급진적인 반응이라는 이유이다. 이 부름은 마태가 표현했듯 예수가 요구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이 한 것이다.

철저한 복종을 요청하는 예수의 부름은 오늘 이 시대에도 바뀌지 않았다. 요구가 축소되지도 않았다. 예수는 많은 유대 젊은이들이 랍비공부를 할 때처럼 그의 밑에서 배우려는 희망을 갖고 지원하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랍비 예수는 그러한 관계의 자격을 가진 것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흔쾌히 따르는 제자, 배우는 자, 도제를 찾았던 것이다. 대단한 부름이다. 대단한 사명이다. 대단한 구세주이다.

목회적 관점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보여준다. 마태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걸으면서 맨 처음 네 제자를 부르셨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따라오라고 부른 사람들은 모두 어부였다. 마태는 그들이 즉시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갔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그들이 하던 일을 버려두고 즉시 따랐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마치 예수를 따르고 복종하라고 강요받은 것처럼, 마치 그들이 그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을 받을 것을 평생 기다려 온 것처럼, 예수가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을 즉시 내려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의 첫 번째 책을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 마음은 쉴 수가 없다”는 기도와 선언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이미 가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이들 네 명도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모든 것을 버려두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태어날 때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있는 것, 즉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지식에 단순히 반응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뿐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너무 많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절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본문은 네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제자가 될 때, 예수께서 시작한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23절) 우리가 듣고 있는 음성이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목소리 뒤에 있는 사람을 반드시 살펴보아서, 그 사람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서 우리를 부르는 많은 목소리 가운데서 어떤 음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외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계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지탱하시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설교적 관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삶 가운데서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시작하는 일들은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그 일들이 규칙적이고 또 거기에서 익숙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익숙한 삶 밖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희망과 도전 두 가지를 다 경험할 수 있다. 이번 주 복음서는 예수의 초기사역에 나타난 사건으로부터 새로운 상황 - 곧 우리 교인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예수의 부름과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의 체포 후에 예수는 하늘나라 (the kingdom of heaven)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늘나라”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성공회 감독이자 성서학자인 톰 라이트 (N.T. Wright)가 지적하듯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느냐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께서 언급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탈출이 아니고 이 땅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관한 것이다. 우리 교인들은 이번 주 성서정과에서 예수의 부름은 미래의 구원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오늘의 행동을 말하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은 그래서 전도에 관한 설교를 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 주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와 보라” (come and see)는 말씀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이번 주에 그는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follow me)라고 용기를 주면서 직접 제자들을 부른다. 교인들은 사람을 낚는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오늘날의 이야기 혹은 보다 생동감 있게 비교할 그 무엇이 있을까? 교인들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일상적 삶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봉사로 나아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은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일을 모험으로의 부름이라고(Call to Adventure) 말했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던 때, 그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볼 수 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17절). 캠벨은 그 순간이 “운명이 그 영웅을[예수] 불렀고 그의 영적 중심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공동체에서는 무슨 일이 꿈틀거리고 있는가? 개인 혹은 공동체가 들어야 할 특별한 요청이 있는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라. 모험으로의 부름에 대해 신앙적으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어떻게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 또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후에 야고보와 요한은 이 부름에 곧바로 응답했다. 이 어부들은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들과도 의논하지 않았고 은행잔고도 고려하지 않았다. 예수는 불렀고 그들은 응답했다.

무엇을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가? 어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믿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교인이 되기 위해 그렇다고 하고 또 봉사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나를 따라 오너라”는 부름은 “철저한 제자됨”으로의 부름이며, 오직 우리자신을 예수의 명령에 따라 포기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커다란 기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설교자는 예수의 철저한 부름과 그 부름에 대한 첫 제자들의 철저한 응답을 생각하고, 교인들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부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 제공(cafe.daum.net/ser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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