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폭력, 그리스도 없는 교회
픽션폭력, 그리스도 없는 교회
  • 황재혁 객원기자
  • 승인 2018.04.02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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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순례 9, 프래너리 오커너의 『현명한 피』를 걷다.

몇 년 전부터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팩트폭력’이란 단어가 있다. ‘팩트폭력’은 상대방이 전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적 내상을 입힌다는 의미다. 그런데 필자는 프래너리 오커너의 『현명한 피』를 읽으며 ‘픽션폭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현명한 피』는 프래너리 오커너가 지은 소설이기에 팩트가 아니라 픽션이다. 그러나 이 픽션에 너무 사실성이 넘쳐서 독자에게 정신적 내상을 입힌다. 「가디언」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권의 소설”에도 속한 『현명한 피』는 과연 어떤 소설이기에 독자에게 픽션폭력을 가하는 것일까? 이 책의 번역자인 허명수 교수는 『현명한 피』의 문학 장르를 이렇게 설명한다.

 

문학 사조로 볼 때 『현명한 피』는 미국 남부 고딕(Southern Gothic)과 그로테스크(grotesque) 문학이 잘 결합된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딕 문학은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유행한 문학 사조로, 중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을 배경으로 신비감을 주는 동시에 공포스럽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문학 양식이었다. 그로테스크 사조는 로마 시대 지하 동굴 ‘그로토(grotto)’에서 기원하여, 부조리한 인간 사회의 한계, 주인공들의 좌절과 불확실성에 대한 고찰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258~259p.

이 소설은 고딕양식으로 지은 건물처럼, 신비감을 주는 동시에 공포스럽고 환상적이다. 픽사베이 갈무리
이 소설은 고딕양식으로 지은 건물처럼, 신비감을 주는 동시에 공포스럽고 환상적이다. 픽사베이 갈무리

 

『현명한 피』의 배경은 성서 지대(Bible Belt)라고 흔히 불리는 미국 남부 지방이다. 그곳은 개신교 근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보수적인 지역이다. 즉 그 지역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개신교의 가르침에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개신교에 익숙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 헤이즐 모츠의 할아버지는 순회 설교자로서 일평생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헤이즐 모츠는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는 비성찰적 개신교인이었지만, 군대에 제대할 때는 성찰적 무신론자가 된다. 그런데 헤이즐 모츠가 단순히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표현도 적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파하기 때문이다.

 

난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합니다. 나는 맹인이 보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채 있는 교회의 성도이자 목사입니다. 그 교회에 대해 물어보세요. 나는 어느 곳이든 듣는 누구에게 라도 말씀을 전할 겁니다. 애초에 타락할 것이 없었기 대문에 인간의 타락은 없었고,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도 없으며, 타락과 구원이 없었으니 심판도 없었다고 설교할 겁니다. 예수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 빼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121p.

 

 

소설에서 주인공 헤이즐 모츠가 외치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교회다. 그곳에는 회복도 없고, 치유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다. 소설 속 헤이즐 모츠의 외침이 뼈 아픈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확신하는 한국교회가 혹시 어느새 ‘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된 것은 아닐까 의심 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렇게 시큰둥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냉랭하게 말할 수 있을까? 헤이즐 모츠가 전하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상 아무런 열매가 없는 교회를 향한 통렬한 풍자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교회를 향한 날 선 비판이다.

『현명한 피』를 읽으면 깨진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소설전개에 정신이 혼미하다. 마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고성(古城)을 밤에 홀로 거니는 느낌이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 단 한사람도 소위 ‘정상인’이 없다는 것은 픽션이지만 또한 팩트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얼마나 아픈 사람이 많은가? 우리가 속한 교회에 얼마나 병든 사람이 많은가? 안녕하다고 말하지만 결코 안녕하지 않은 사회와 교회를 어둠속에서 성찰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의 독서는 그 자체가 기도이며, 구원의 여정이며, 진리를 향한 순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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