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은 너무 착한 사람이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제물로 희생이 될 상황에서도 저항하지 않고 순하게 받아들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기들이 판 우물을 그랄 목자들이 다투며 빼앗으려 했을 때, 양보하고 새로 팠더니 또 다투므로 두 번째 양보하고 다시 판 후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장소가 넓음)”이라고 불렀다(창 26:20).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될 처녀를 구하려고 나홀의 성에 이르러 우물가에서 마침 물 길으러 온 리브가에게 물을 청하였을 때에 사람에게 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였다(창 24:12-20). 이렇게 착한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으니 아무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였다. 인간은 결국 죄인인지라 문제가 아주 없을 수는 없나보다. 이 가정의 문제는 자녀 문제인데 부모의 입장에서는 편애, 그리고 편 가르기가 문제였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훈도하지 못했다. 리브가도 야곱 사랑이 지나쳐 에서의 축복을 탈취하는 일에 앞장서서 아주 목숨 걸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이삭을 속였다. 오늘날도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평범하게 잘 살았는데 왜 갈등이 생기나? 사람 사이의 갈등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갈등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삭은 그 엄청난 일을 당하고서 깨달았을 것이다. 즉 자기가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부러 잊으려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고 하셨는데 그는 야곱을 에서로 생각하고 축복하기를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27:29)”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에서에게 장자로서의 축복을 하더라도 다른 아들도 불러서 각자에게 축복해야 했었다. 야곱은 처음부터 부르지도 않았고 모든 축복을 에서인 줄 알고 야곱에게 다 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에서가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하며 하소연 할 때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27:37)”고 했다. 에서에게 축복해줄 것이 없다는 말은 원래 야곱에게는 남겨 놓은 게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리브가도 화가 날 만 했다. 물론 야곱과 둘이 한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이삭의 책임이 크다고 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뜻대로 하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무튼 이삭은 깨닫고서 이제는 야곱에게 다시 축복하는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28:4)”고 했다. 이는 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 믿음의 사람은 실수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았을 때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