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디모데 목사(예하운선교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인터뷰] 김디모데 목사(예하운선교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11.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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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김디모데 목사는 예하운선교회 대표로, 세차장 직원으로 누구보다 활발하게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과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걷고,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연대했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 돕기 사업, 빈곤가정 아이들을 위한 생리대 지원 사업, 파키스탄에서 목회를 하다 한국으로 피난 온 현지인 목사님을 돕는 기독교 피난민 돕기 사역 등을 펼쳐왔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의 친근한 예수님 ‘샬롬스토리’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뒷골목에서 만난 하나님’을 저술했다. 그가 대답하는 ‘우리의 이웃’에 대해 들어봤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당신 유대인이오? 예수 믿소?’ 체크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 사역을 하는 곳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김디모데 목사. 정성경 기자

 

 

뒷골목에서 만난 하나님 전하는 예하운선교회

교회가 하지 못하는 사역 감당하고자 세워

원죄와 사회 구조 악을 같이 보는 신앙 관점 필요

“교회를 넘어서 소외된 이웃의 손 잡아주길”

어떻게 목사가 되었나.

어렸을 때는 건물주가 꿈이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으로 편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잘 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중‧고등학생때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채플을 드리면서 선생님 중에 신앙생황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었다. 재밌었던 것은 선생님 한분이 학교에서 담배 피다 걸리면 “우리교회 나와서 예배드릴래? 징계 먹을래?”라고 물으셨다. 나도 몇 번 걸렸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6‧25참전 용사이자 명리학, 성리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의 영향과 철학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불교나 기독교를 통치수단으로 생각했었다. 노비나 빈민 계층이 치고 올라오지 못하게 극락이나 천국이라는 내세를 심어주고 현재의 너의 신분과 위치에 만족하고 살라며 사회의 구조 악을 못보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수련회 찬양 시간에 고조되서 내 삶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에 따라 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게 되게 조심스러운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회 짓고, 사업하고 사역하는데 말아먹지 않나. 그러면 결과론적으로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보다’라고 흔히 생각한다. 망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 열매가 없어야 되는데 그 과정 중에 은혜를 받고 좋은 열매가 있기도 하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사람마다 자신의 욕망이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이것에 정직해야 한다.

흔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많은 일들을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각자의 신앙관과 가치에 따라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봐야 한다. 내 의도가 오해당할 만 해도 하나님 앞에 순전하다면 그분께 맡기자 라는 생각에 여유가 생겼다. 타인에 대해서도 쉽게 정죄하지 않는다.

예하운선교회 활동이 특별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평가를 받았다. 이 평가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다. 지금으로 따지면 악성댓글이다. 예수님이라고 이것을 몰랐을까? 요즘 목회자들 특징이 저 자리에 가면 좌파소리 들을텐데, 저 자리에 가면 내가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고, 내가 동성애 옹호자라고, 종교다원주의 구원자라고 오해 받을 수 있고, 저 자리에 있으면 이런이런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날 싫어하겠지. 오해하겠지. 후원이 끊기고, 관계가 나빠질 수 있겠지라는 계산을 하느라고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내가 담임 목사가 아니라 선교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죄사함 받고 영혼 구원 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건 인정하다. 그것을 이뤄나가기 전에 정치적 성향이나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견해 차이로 인해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릴까봐 자제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라 안타깝지만 절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입장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된다. 나 역시도 부교역자 사역을 했기 때문에 그분들을 비겁하다고 정죄하거나 비난하기는 싫다.

예하운선교회와 이번에 ‘뒷골목에서 만난 하나님’을 쓴 것은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님의 리더십이 멋있는게 마태는 세리 출신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앞잡이었다. 게다가 질롯당 시몬은 독립운동가였다. 지금으로 치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계급장을 떼고 예수님 밑에 와서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는 세리를 그만뒀고, 시몬은 칼을 내려놨다. 예수님의 비폭력저항이라는 하나님 나라 가치로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게 필요하지 않을까.

 

교회 안의 갈등이 심하다. 젊은 목회자로서 현실을 어떻게 보나.

다르다. 너무 다르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옛날을 추억한다. 그것이 오버랩 된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젊은 세대는 진취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예하운선교회를 한다. 거창하고 헌신적인게 아니라 교회가 솔직히 썩었다 타락했다 망했다고 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교회는 원래 죄인된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교회는 어차피 타락했다, 개혁했다 그런다. 그런데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중세시대에 태어났으면 중세시대에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귀족이나 노비, 농부 그 상황에서 타락했으니까 개혁하는데 삶의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역량을 하면 된다. 그런데 개혁의 정점에 달했을 때, 좋은 국가에 좋은 분위기가 조성된 타이밍에 태어났다면 개혁할게 없다. 그러면 열심히 선교하고 구제하다 가면 된다. 50년을 더 산다고 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중세시대보다 낫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식당이나 심지어 기차에서도 담배를 폈다. 그런데 지금 그러면 큰일 난다. 불과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게 잘못인지도 모르고 인지도 안됐는데 시간이 지나니 개념의 문제가 되고, 몰상식이 된 것 아닌가. 교회 안의 세습 문제든 성적 문제들도 ‘깨어있는 교인’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와서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난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불로 심판하실것이고 끝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요한계시록을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문제가 그러면 세상이 끝날 때 남는 게 뭐냐? 한명이라도 더 구원시켜서 교회 세우고 영혼구원에 집중시키고 그게 천국 가서 상급 받는 최고의 신앙의 형태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해 내가 주렸을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와서 해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재밌는 것은 해준 사람도 안 해준 사람도 모르고 있다. 성경은 항상 고통 받는 이웃들, 그게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구분 없이 이야기 한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안보이지 않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네가 왜 나를 핍박하냐”고 하신다. 곧 사도바울이 핍박했던 대상들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같은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곧 예수님이라는 거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선한사마리아인에서 흔히 고통 받는 이웃, 단순히 레위인, 제사장들을 지금 시대로 따지면 목사님, 교수님, 장로님 권사님으로 본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줬는데 그것을 우리로, 혹은 예수님으로 해석을 한다. 흔히 알레고리로 어거스틴이 처음으로 해석하는데, 예수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것은 교회 떠나 세상으로 가는 거다. 제사장은 유대교, 선한사마리아인을 돕고 올리브유랑 포도주로 상처 받은 데를 해주는데 올리브유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다. 주막은 교회고 다시 오는 게 예수님의 재림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당시 이 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듣지 않았다.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고 되묻자 성경의 핵심인 ”마음을 다해 주 여호와를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다. 첫 질문이 영생이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드신다. 율법사가 뭐라고 답변을 하냐면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는 게 정말 말도 안되는 대답이다. 애들한테 이것을 물어보면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겠죠’라고 대답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마리아인이 혼혈이라 깔봤다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한테 사마리아인은 그 이상이었다. 사마리아 인이 사마리아에 사는 게 앗수르가 혼인정책을 쓰면서 유단 10지파가 앗수르 인들하고 이방민족하고 섞였다. 그래서 남유다가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재건한다고 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와서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으니 참여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이 유대인들이 니네들은 참여 못한다고 선을 긋는다. 사마리아인들은 열 받는다. 혼혈이 되고 싶어서 됐나? 부모들이 강압적인 정책에 의해 앙숙이 된거다.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사함의 장소, 대제사장이 죄 속죄일에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의 죄를 사함을 제사의식의 형태는 솔로몬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말씀하신 내용이고 장소까지 지명해주셨다. 그래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해서 재건하는데 사마리아인을 못 끼게 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래서 전쟁도 하고 방해도 하다가 알렉산더 대왕한테 산발랏이라는 왕이 그리심산산 요한복음에 물 길러온 사마리아인한테 물 달라고 하니 우리 조상을 대대로 그리심 산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있는 성전밖에 없는데 벤치 마킹해서 그대로 흉내 내면, 만약에 누군가 예수님을 모방해서 특정 교주가 구원자라고 하면 그것을 이단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 사고에 불신자보다 이단을 더 안좋아 한다. 이단을 전도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요한일서에도 이단들하고는 인사하지 말라고 나왔다. 이단은 지옥 땔깜이다. 교회에서 신천지, 여호와 증인 전도하라고 하나? 거의 안한다. 권하지 않고. 유대인들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은 이단이었다. 지금이라도 따지면 목사님도, 장로님도 그냥 지나나고 신천지가 도와준거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인이라는 대답이 안나온거다. 예수님이 얄궂으시고 풍자한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무슬림이 한거다.

그럼 교리적으로 따지는 분들은 신천지처럼 착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야? 라고 따질 것이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이 비유를 받아들이는 체감도는 이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보혈의 은혜를 마치 보험상품처럼 나 이제 예수 믿으니까 개판으로 살아도, 엉터리로 살아도 천국 간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예하운선교회가 하는 사역은 한국교회가 영혼구원에 치중한 나머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에게‘ 당신 유대인이오? 예수 믿소?’체크하고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역이 필요하다. 이런 운동을 하다보면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위안부문제, 남북문제, 노숙인 문제, 청소년 문제 각자의 부르심에 콜링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인이라면 그런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시민단체나 사회운동가들이 할 일이지 목사가 할 일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할 일이 아니다. 목사나 기독교인은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그 사람들을 안타까워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손잡아주는 거’라고 하는데 나는 그 이상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한테 예수님 왜 죽었냐고 하면 내 죄를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그 선을 못벗어 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사회변혁적인 활동으로만 본다. 그래서 서로 유치하게 보는 오만함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2가지 관점이다. 우리 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였지만 동시에 팍스로마라고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로마정치 시스템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저항하고 거절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같이 잡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바라봐야 될 것은 모든 문제 원인을 사회 구조악으로 바라보면 인간이 지은 원죄를 망각하고, 인간의 원죄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구조악을 망각한다. 이 두가지를 같이 적용하는게 복음서에 나와있는 복음서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신앙 기반하에 예하운선교회가 그렇게 된 것이다.

친구들 이야기를 하다 잠깐 정적이 흐르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김디모데 목사는 '예수님의 제자'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정성경 기자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될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리와 창기들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느 날 전화번호부를 보는데 친구 중에 세리와 창기가 없었다.(잠깐 정적이 흐르면서 눈물을 훔쳤다.) 너무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아치만 사귀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맨날 목회자들이 같은 목사들, 교인들만 만난다. 예수님은 그 현장에 가셨는데 난 그러고 있지 못하는구나. 예수님 제자라고 하고. 난 그렇게 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라는게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양산될 수밖에 없는 소외된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가 수요예배 드릴 때 예하운선교회가 교회에 물들이는 것이, 매주 수요예배를 드리시는데 가능하면 분기에 한번이나 한달에 한번 교인들과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현장에 가서 함께 삶의 예배로 생각하고 동참하는 게 어떨까.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 집회하는데 같이 가는 것 이런 것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기존교회 체질이 한번에 바뀔 수는 없지만 교회를 넘어 세상의 이웃들과 함께 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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