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와 비주류의 역설
주류와 비주류의 역설
  • 박은호 목사
  • 승인 2019.11.14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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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회가, 어느 시대에, 어디에 있는 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일전에 어느 의미 있는 모임에서, 참석한 한 목사의 입으로 난 평생 처음 듣는 말을 들었다. 필자가 속해 있는 교단의 제104회 총회를 기점으로 부자(父子) 목사 세습을 한 M교회를 지지하는 측이 우리교단의 주류(主流)가 되었고, M교회를 반대하는 측이 비주류(非主流)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의 발언에서, 주류와 비주류가 역전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필자가 속한 교단 총회 안의 온갖 관련된 움직임들의 그 전 과정(全 過程)에서 일어난 사태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 사태를 두고 보는 시각들이 이리도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處事)들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또 주류가 되기 위한 온갖 도모(圖謀)들이 있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 아니고 무엇인가? 또, 사리분별의 문제를, 교단의 질서와 공교회의 법질서의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값싼 동정의 문제로, 그만하면 되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주류의 자리를 틀고 앉았다는 것은, 그만큼 판단력 좀 순화된 표현으로 쓰면 분별력을 상실한 집단이 되었다는 얘기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가까운 사회학자 친구가 오래 전에 얘기 한 것이 있다. “집단은 양심도 없고 도덕도 없다. 집단에는, 집단의 논리만 존재할 뿐이다”고 했다. 타 교단을 탓할 마음도 없을뿐더러, 필자가 속한 교단이 코가 석 자인데,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어쩌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필자의 교단이, 전환기에 들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커브에, 이리도 분별력 없이 그 가속의 페달을 보란 듯이 밟아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이제, 옛 성현이 말씀하셨던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코앞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단의 실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눈목격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지! 좌표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망연자실한 이 복잡한 심경이 내가 이 시대의 목사가 맞는가? 하는 기본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던 터에, 이전에 섬기던 교회의 한 성도로부터, 10여년 만에, 받은 갑작스러운 카톡 문자 하나가, 이 참담한 심정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그 성도로부터 받은 카톡의 내용은 이러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 후에, “다름 아니라/ M교회는 내놓은 사람이지만/ 통합측 900여분/ 리더들의 행동, 찬성에/ 동의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날까?하다가/ 용기가 안나/ 성공회로 발길을.../ 그런데/ 11월 26일 집회가 있던데/ 가 봐도 되는지요?” 10여년 만에,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옛 목사를 찾아, 애타는 심정으로, 혹시나 기댈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보낸 문자, 아닌가! 평상시 같으면, 오랜만에 온 연락에 즉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대화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젠 상식조차도 지키지 못할 이 시대의 목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괴감에, 짧은 답변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녜, 집사님!/ 좋지요./ 그날, 거기서/ 뵙지요!” “네, 알았습니다”는 간단한 답을 받고, 지금까지 서로가 침묵하고 있다. 11월 26일의 집회?에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필자가 속한 교단의 밑바닥의 가슴앓이다. 이런 가슴앓이는, 예수님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아이들 중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만일 네 손이 너로 죄 짓게 하면, 손을 잘라버리라,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낫다”하신 말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문제일까?

돌이켜 보면,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적 전승(使徒的 傳承, Apostolic Church) 위에 서 있는 공교회가, 어느 시대에, 어디에 있는 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주류였던가? 당시의 주류는 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당국자들과 그와 궤를 같이하는 자들이, 주류였지 않았던가? 십자가는, 비주류의 역설이다.

 

박은호 목사

정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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