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 70~80년 전 악몽 현재진행형-①
위안부: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 70~80년 전 악몽 현재진행형-①
  • 김농률 지역기자
  • 승인 2019.1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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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이 들릴 때는 악몽에 빠져요”
고통과 상처 돈으로는 환산 못 해
진상규명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해

지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들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사진과 영상에 담은 전시회가 이달 20일까지 광주에서 열린다.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지난 6일부터 마련된 ‘겹겹-지울 수 없는 흔적(부제: 아시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록과 지원)’ 사진전은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여성들의 고통과 애환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일본정부에 의해 왜곡되고 숨겨진 진실과 피해자들의 피멍든 삶 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고통을 28점의 생생한 증언과 200여 장의 사진으로 기록했다.

 

안세홍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피해여성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문화예술로서의 사진전을 통해 우리나라, 일본 등 국제사회에 일본군 성노예 피해여성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가슴 속 깊이 겹겹이 쌓인 그녀들의 한을 함께 나누는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세홍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피해여성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문화예술로서의 사진전을 통해 우리나라, 일본 등 국제사회에 일본군 성노예 피해여성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가슴 속 깊이 겹겹이 쌓인 그녀들의 한을 함께 나누는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며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사진작가 안세홍씨(48)는 24년 전 한국을 방문해 경기도 나눔의 집에서 처음 만난 일본군 성노예 피해여성들의 가슴 속에서 묻어나오는 한 맺힌 눈빛과 말들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오늘까지 ‘그녀들’을 만나며 영상에 담는 이유다. “전쟁이 끝나고도 척박한 중국땅에 버려져야만 했던 조선인 피해여성들을 2001년에 만나면서 가슴 깊이 그녀들의 고통을 받아들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해야만 했다. 안 작가는 1996년부터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에서 140여 명의 생존자를 찾아 나섰다. 중국 내륙의 오지에서부터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변방 깊은 곳에까지 살아있는 역사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그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눈물과 아픔을 말해주었다.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위안부, 193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십만 명의 여성이 동원되었고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남겨진 피해여성들도 있다. 안 작가는 2001년부터 중국 오지 화이룽장성에서 내륙 깊숙한 우한에 이르기까지 상해, 베이징, 산둥 등지에서 13명의 생존자를 찾을 수 있었다. 수십 회에 걸쳐 중국을 오가며 만난 그녀들은 성노예로서의 고통 속에 지금까지 사투를 벌이며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16세(1944년)의 나이에 8개월을 일본군 위안부가 돼야 했던 고 하상숙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곱게 화장한 이웃집 언니가 왔어요. 일본 공장에서 돈을 번다고 했고, 이번에는 상하이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나는 좋다고 했어요. 며칠 있다가 남자 두 명이 찾아왔어요. 기자를 타고 경성(서울)으로 갔고, 다른 곳에서 온 40명의 여자들과 다시 기차를 타고 단둥을 거쳐 난징으로, 배를 타고 우한으로 왔어요. 한커우 지칭리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과 말이 달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어요. 먼저 군의관이 검사를 하고 아이 못 갖는 주사를 놨어요. 처음 3명의 군인을 받고 나서 오줌을 누는데 칼로 베는 듯 아팠어요. 나는 2층 방에 있었는데 1층에 사진을 걸어두면 군인들이 골라서 방으로 들어왔어요.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밖에 줄을 서고 있었어요. 한 사람에게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넘으면 주인에게 혼났어요. 전쟁이 끝나고 조선사람들은 지칭리에 모였어요. 많은 여자들이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이 몸으로 돌아가서 뭐 할 거냐는 생각에 가지 않았어요.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아이 셋 달린 중국남자와 결혼해 살았어요.”

일본은 한국의 젊거나 어린 여성들을 업자나 헌병, 경찰, 조선총독부를 이용해 돈벌이가 있다고 속이거나 인신매매, 유괴, 연행 등으로 중국이나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 위안소에 보냈다. 한국정부는 1980년대에 와서야 ‘위안부’ 조사를 시작해 1991년에 김학순씨가 피해자로 처음 증언하면서 270여 명이 피해자로 신청했다. 한일 정부는 2015년 말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정부 간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지만, 피해자와 지원자로부터 강한 비판의 목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

북한에서는 1992년에 피해조사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자에 대한 청취조사를 했다. 같은 해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2차대전 이후 보상에 관한 국제공청회’에서 김영실씨가 증언을 해 처음으로 남북의 피해여성이 대면했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한국과 대만, 일본 여성들을 각지에 성노예로 보냈지만 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점령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성노예로 삼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수개월에서 3년여에 갈쳐 피해를 입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현지에 남겨져 현지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으며 아중 삼중의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안 작가는 2013년부터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현지에서 피해여성 90여 명을 만났다. 국가와 나이, 동원기간 등 피해사례는 서로 달라도 이들 여성들이 겪은 고통은 다르지 않다고 했다.

1945년 당시 16세의 나이에 5개월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해야 했던 인도네시아인 Dg Tija 씨는, “중학교 3학년 정도에 일본군이 Ujang Pandang으로 들어왔어요. 처음에 아버지가 잡혀갔고, 10일 뒤에 아버지가 모르는 상황에서 나도 4명의 일본군에게 잡혀갔어요. 거기에는 10명 정도 다른 여자도 있었어요. 보통 하루에 3명의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추가적으로 2명이 더 올 때도 있었어요.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웠어요.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갈 수가 없어 울면서도 당했어요. 반항을 할 때는 나무에 손을 줄로 묶었어요. 거기에 있는 동안 성기에서 피가 났지만 아무런 치료도 약도 없었어요. 일본군은 성관계 후 이상한 약을 줬어요. 임신이 안 되는 약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곳에서 죽는 여자도 있었어요. 한 친구가 아프고 나서 짐에 돌아가서 일주일 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힘이 빠졌어요. 5개월 있다가 일본군이 돌아갔어요. 집으로 돌아온 이후 아버지에게 그 일을 얘기 안 했어요.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되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 Gowa문화는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면 죽어야만 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앉았다 일어나면 다 아파요. 너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악을 먹으면 좋아져요.”라면서 약을 계속해서 먹고 싶다고 했다(형편이 어려워 약을 제대로 못 사드심).

일본군은 1942년 3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화란령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침략해 해군이 보르네오와 인도네시아 동부를, 육군이 자와 섬과 수마트라 섬을 점령했다.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되거나, 촌장 등으로부터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좋은 일자리가 있다”라는 말에 속아 위안소에 넣어졌다. 각지의 주둔 부대가 인근 여성들을 병사들에게 넘겨 강간하거나 장교들이 현지처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주변 섬들이나 버마, 필리핀 등으로 연행된 여성들도 있었다.

1993년 인도네시아 법률지원협회(LBH)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등록을 호소하자 1만7천 명 이상이 등록했으며, 청취조사에서 250명 이상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이 밝혀졌다. 1995년에는 병보(현지인 보조병) 교회의 요청으로 2만 명 이상이 등록했고 지금도 추적조사와 펑취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194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필리핀인 Lucia Luriz씨는, “집에서 빨래한 옷을 널고 있었는데 일본군 3명이 와서 양쪽 팔을 잡았어요. 일본말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어 나는 두려웠어요. 강제적으로 끌려서 Arayat central school로 갔어요. 나는 방안에 혼자 갇혔어요. 방에 2명의 군인이 들어왔고, 나는 방안에서 군인을 피해 이리저리 피했지만 잡혀서 맞았어요. 첫 번째 군인이 나를 성폭행할 때 심하게 피를 흘렸고 고통스러웠어요. 다음 군인이 할 때는 의식을 잃었어요. 깨어나니까 옷이 피에 젖어 있었어요. 동생 Valeriana도 잡혀와 한 방에 있었는데, 같은 고통을 겪은 것처럼 보였어요. 다음 날에도 군인이 왔어요. 내 몸은 아직 부어 있었어요. 군인은 상관하지 않았어요. 낮에는 청소를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3,4번씩 성폭행을 당했어요. 결혼을 할 때 남편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어요. 가끔 TV에서 일본말이 들릴 때는 악몽에 빠져요. 성폭행, 정서적, 신체적 손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요. 일본정부는 전쟁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요.” 

안 작가는 할머니의 방 한쪽에 기도를 하기 위한 십자가와 예수상이 있었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매어져 온다고 회상했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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