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송용걸 목사(신천교회 은퇴 목사), “하나님의 눈물이 지금까지 이끄셨다”
[인터뷰] 송용걸 목사(신천교회 은퇴 목사), “하나님의 눈물이 지금까지 이끄셨다”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10.18 15: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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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은 쓰임 받는 최고의 도구”

송용걸 목사가 개척한 시카고 헤브론교회는 최대 한인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던 2007년, 성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0세가 되던 해 그곳을 떠나 서울 신천교회에 부임했다. “교회가 거대해질수록 사유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70세가 되어 신천교회를 은퇴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지난 해에는 은퇴 기념으로 ‘하나님! 절 울리셨습니다’를 출판하며 목회여정을 담담히 기록했다. 현재 부산에서 해운대고를 빌려 홍민기 목사와 ‘가나안 성도’를 위해 사역하며 세계 곳곳으로 집회를 다니는 송 목사를 만나 ‘쉬지 않는 사역’ 얘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모든 사역을 하나님이 떠미셔서 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송용걸 목사. 정성경 기자 

 

시카고에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서울 신천교회 60세에 부임해

정년 은퇴 후 새로운 사역 시작

 

어떻게 목회를 하게 되셨나

외조모가 황해도에서 재령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한일톤 선교사와 동역했던 이현애 전도사님이다. 1940년 심사참배 거부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1947년에는 황해도 대원교회 전도사로, 1949년에는 해주 제일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 1953년 월남해 부산에서 유상근 목사님과 성성교회를 섬기고 195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박성겸 목사님과 금성교회를 개척해 시무하셨고, 인천보합교회에서도 일하셨다.

6‧25때 부친을 잃고 1950년 5살이었던 나는 어머니와 남동생과 사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리고 전쟁 미망인들이 거주하던 용산의 평화 모자원에서 생활했었다. 대형차에 치여서 죽을 뻔도 하고,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갈 때 관악산 벧엘기도원에서 한 장로님의 기도로 살려주셨다. 그때 어머니께서 “아들을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 위해 바치겠다”고 기도하셨다.

무일푼으로 떠난 피난길에 고된 생활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지키셨다.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으로 연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학을 연구하는 것보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님의 추천서로 총신대에 들어갔다.

총신대를 다니며 영등포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옥한흠 목사님을 만났다. 당시 옥 목사님은 성균관대 영문학과였는데 같이 그룹과외를 했다. 당시 영등포는 공장지대로 교회에서 대학생은 나와 옥 목사님뿐이었다. 교회 청년들이라곤 여공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날 청년부에서 기도모임을 하는데 옥 목사님이 흐느껴 울며 “하나님, 우리 배고파요. 너무 피곤해서 못 견디겠어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전체가 다 울었다. 옥 목사님과 청년회지도 만들고, 같이 여름성경학교도 하면서 그분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다.

그 후 옥 목사님은 갈현동 은평교회로, 나는 청파동 삼일교회로 가면서 헤어졌다. 나의 첫 부임지가 삼일교회 어린이부 전도사였다.

 

굉장히 역동적인 목회를 하셨다. LA에서, 시카고로, 서울로, 이제는 부산에 계신다. 그 이야기를 해주시면?

삼일교회에서 어린이부 전도사를 시작으로 군2군단 군종참모부 군종병으로 섬겼다. 평안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곳에서 훌륭한 김윤찬 목사님과 아버지같은 이성택 목사님을 모셨다. 그곳은 나의 첫 번째 풀타임 전임 사역지이자 나의 고향집 같은 교회다.

1977년 미국에서 간호사로 있다 잠시 귀국한 아내를 만났다. 결혼 후 미국으로 가서 이민 목회를 시작했다. 아내가 출석하던 나성필라델피아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시무하고, 오렌지카운티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곳은 90%가 백인들이 모여 살면서 한일교회에 임대하면 김치 냄새 난다고 꺼려했었다. 힘들게 3주 만에 침례교회에서 임대를 허락받았다. 어느 날 아내가 천페이지 분량의 지역전화번호부를 들고 와서 A부터 Z까지 한국 이름 같은 곳에 주소를 옮겨 적고 교회 소개 편지를 보냈다. 동양인이 5%였던 그 곳에서 총 28통의 편지를 썼고, 14가정이 교회에 방문했다. 1년 만에 100여명의 성도가 모였다.

1987년에 대륙을 횡단해 시카고에 와서 헤브론교회에 부임했다. 사람들은 오렌지카운티에서 교회를 잘 세워놓고 시카고로 옮기는 나에게 무모한 선택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했다. 그곳에서 세계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부임한지 2년 후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으로 부흥했다. 예배당 확장을 위해 기도할 때, 막내 딸 수잔이 다니던 ‘AWANA’를 진행하던 선교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생각하던 장소보다 컸지만 믿음으로 1990년 6월 입당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시카고 헤브론교회는 미국 한인교회에서 큰 대형교회로 자리매김했다. 60세를 몇 달 남기고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책임감과 애통하는 마음이 나를 흔들었다. 그때 담임 목사 청빙건으로 내분이 있던 신천교회 소식을 들었다. 그때 친구였던 문용길 목사가 신천교회 당회에 ‘송용걸 목사 청빙’을 건의하면서 청빙 제안이 들어왔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아니 한국교회로 떠미셨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한국교회의 대형교회들이 세습목회로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서 헤브론교회를 떠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60살에 신천교회에 부임해 10년을 사역했다. 부임하고 나서 “30살에 목사가 돼서 70살까지면 40년 목회하는데 10년 밖에 남지 않았으니 4배로 섬기겠다”고 했었다. 800석의 본당이 부족해 대형교회로 건축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음세대를 위한 비전센터를 짓게 하셨다. 그런데 공사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건축회사가 부도가 나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우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러 갈 정도로 어려움을 당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셨다.

70살에 신천교회를 은퇴하고 부산에서 가나안 성도들을 위해 사역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떠미셨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목사는 교인을 울리고 불신자를 울려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눈물이 말랐다는 것이다. 회개가 없어졌다. 교회에서 연예인들을 내세워 집회하면서 웃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교인들이 뜨겁게 회개하고 기도가 살아나야 되는데 메말랐다. 사막은 물이 없다. 그래서 가시만 나고, 독충이 살고, 맹수만 있다. 자기만 살기 위해 남을 공격하고 찌르는거다. 한국교회 상황이 그렇다. 사막처럼 메말라서 교회 안에서 서로 상처주고 싸우고 갈라선다.

내가 집회를 가게 되면 참석한 교인들이 운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가 끝났는데 한 성도가 찾아와서 미국에서 살다가 왔는데 내 설교 듣고 내내 울었다며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살 것”이라며 설교 노트를 보여줬다.

난 목회하면서 더 바랄게 없다. 설교를 통해 감동받고, 그대로 살겠다고 하면 그게 내가 받은 댓가고 보상이다. 그래서 집회를 다닌다. 반드시 어디선가 터진다.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으면 담임목사라도 은혜를 받고 눈물이 터진다.

정년 은퇴 후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사역중인 송 목사는 "아직 30대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정성경 기자

 

앞으로 비전과 소망이 있으시다면

내가 자주 하는 예화가 있다. 어떤 나라에 왕이 있는데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다. 그 나라 왕은 남자만 가능해서 사위를 구했다. 그 나라에 기라성 같은 남자들이 다 왔다. 하지만 조건이 어마어마한 독이 있는 동물들이 가득한 호수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다들 사위는 되고 싶은데 들어가면 죽을 것 같으니까 서로 미루고 있는 와중에 한명이 들어갔다. 얼마나 독을 품고 지나가는지 맹수들이 얼씬도 못했다. 그가 건너편에 나왔을 때, 언론이 소감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왕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격해서 우는 줄 알고 기다렸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누가 밀었어.”

내가 평생 산 것이 그렇다. 하나님이 날 밀어서다. 시카고에서 한국에 온 것도, 부산에 온 것도. 내가 목회를 한 것은 하나님이 날 울리셨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것은 그것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복음뿐이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미는 곳으로, 울리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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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 2020-01-07 12:28:53
송용걸 목사님 정말 순종의 하나님 사자로서 보배로운 목사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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