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신학] ③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
[예술신학] ③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
  • 심광섭 목사
  • 승인 2019.10.0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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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 목사(예술목회연구원)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 27:4)

지혜서는 하나님을 세상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서술한다. 지혜서는 이방인들이 태양과 달과 별을 신으로 예배하는 것을 비난하고 참된 하나님, 곧 모든 아름다움의 창조자는 그들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만일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것들의 주님이 얼마나 더 훌륭하신 가를 알아야 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아름다움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이런 것들의 능력과 힘에 놀랐다면 마땅히 이런 것들을 만드신 분의 힘이 얼마나 더 큰가를 깨달아야 했을 터이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서 13:3-5).

잠언은 지혜의 말씀이 아름답다고 말한다(잠 1:9; 4:9). 구약의 종말론적 본문들은 미래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사 52:1; 62:3; 슥 9:17), 메시아의 아름다움을 말한다(사 33:17). 마지막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왕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신다(사 28:5). 이사야는 마지막 날에 백성들의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35:2)을 보며 기뻐할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바울의 사상에서도 중심적이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다(롬 1:21.23). 우리가 죄에 속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었다(롬 3:23; 살후 1:9).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우리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후 3:18, 4:6).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화롭게 되고 아름답게 되며(고후 3:18; 빌 3:21)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의 광휘를 충분히 수용하여 영화롭게 변형된다.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말하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인 빛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전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이 변화의 경험은 삶의 의미에 대한 가장 진실된 통찰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함', 1511. 나무위에 유채, 135 x 123,4 cm, 빈 예술사박물관.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함', 1511. 나무위에 유채, 135 x 123,4 cm, 빈 예술사박물관.

서양 기독교 미술사에서 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애썼다. 나는 이 주제로 그린 그림을 ‘삼위일체도’(三位一體圖)라 부르도록 하겠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그림을 “은총의 옥좌”(thronus gratiae)라 부르는데, 이 그림은 중세에 많이 그려졌다. 이 용어는 루터가 히브리서 9장 5절을 “은총의 옥좌”로 번역한데서 유래한다. 은총의 옥좌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부가 십자가를 들고 있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비둘기 모습의 성령을 그려 놓았다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의 역설과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그의 신적인 살아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준다. 인간과 함께한 하나님의 역사의 실제가 삼위일체에서 진실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존재는 삼위일체론에서 관념이 아니라 역사로서 설명된다.

많은 삼위일체도가 있지만 마사초(Masaccio)와 뒤러(Dürer)의 삼위일체도가 인상적이고 대중적이며 아름답게 다가온다. 여기서는 뒤러의 그림만 다루도록 하겠다. 그림에서 오른쪽 위에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도구들을 들고 있으며 생생하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발산한다. 그림은 중앙의 맑고 순수한 하늘바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위는 ‘천상의 세계’(하늘의 도시, civitas Dei)를 아래는 ‘지상의 세계’(땅의 도시, civitas terrena)를 의미하는 것 같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눈부시게 나타나신다. (시 50:2)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림의 정상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밑에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위에서 날아오고 있다. 성령의 밝은 빛이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환히 비춘다. 왕관을 쓰고 황제의 옷을 입으신 존엄하신 아버지는 좌정하시어 창조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양팔을 떠받치고 계시다. 성령, 성부 그리고 성자가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땅과 하늘을 잇는 단 하나의 큰 움직임이다.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성모 마리아를 위한 명예로운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고 모든 성인들, 세례 요한, 열두 사도, 순교자, 교부, 그리고 모세는 두 계명판을 들고 있고 다윗은 하프를 연주하고 있고 왕족의 상징은 담비털을 단 가운을 걸친 솔로몬 등이 보인다. 성인들은 두 개의 반원을 이루면서 하늘의 성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바티칸의 라파엘로 방에 있는 <논쟁>(1508)의 구성과 비스름하다. 성녀들은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데, 이는 순교의 상징이면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찬미하기 위해 가져온 종려나무를 시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그린 하나님의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지복과 무궁한 평화가 삼위일체도에 형상화 되어 있다. 그의 마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하나님의 참된 선함의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내 아름다움이 되신 하나님, ... 나는 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갈망하여 밤낮으로 한숨 쉬고 있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34.53]

아래 지상의 큰 무리의 인간이 천상을 향하여 들어 올려 지며, 영롱하게 빛나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새 노래로 찬양한다. 삼위 하나님은 참된 선함의 아름다움 속에서 영원무궁히 즐거워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만물을 보고 매우 좋다(아름답다)고 말씀한다. 만물은 하나님이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것을 좋다고 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봄’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만물의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 안에서 선선하게 빛나며 산들거리는 기쁨이 모든 피조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며 완성한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은 세상을 삼위일체화(Trinification)한다.

전체적으로 뒤러의 그림은 매우 환상적이다. 인물상들의 양감과 중량감이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부유(浮遊)함을 느끼게 하며, 강력한 원근법 효과로 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찾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X,27,38)은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순례기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애타게 찾고 난후 기쁨의 마음을 이렇게 애절하게 노래한다.

"그렇게도 오래 되셨지만 동시에 그렇게도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o antiqua et nova)이 되시는 당신을 나는 너무 늦게야 사랑하였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나 밖에 나와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흉하게 되어버린 나 자신은 당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피조물 속으로 거꾸로 떨어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셨건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나를 당신에게서 멀리 떠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피조물들의 아름다움도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당신은 부르시고 소리 질러 귀머거리 된 내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빛을 나에게 번쩍 비추사 내 눈의 어두움을 쫓아 버렸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향기를 내 주위에 풍기셨을 때 나는 그 향기를 맡고서 당신을 더욱 갈망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맛보고는 이제 당신에 굶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당신이 나를 한번 만져 주시매 나는 당신의 평화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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