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호] ‘뿌리깊은나무’ 한창기와 맺었던 젊은 날의 기억
[66호] ‘뿌리깊은나무’ 한창기와 맺었던 젊은 날의 기억
  • 주필 이창연 장로
  • 승인 2019.09.04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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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목가적이다. 푸르렀던 식생이
갈색으로 변하고 맑고 높은 하늘과
추석명절이 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다."

벌써 가을이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가고 옷깃 사이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스며든다.

가을은 목가적이다. 푸르렀던 식생이 갈색으로 변하고 맑고 높은 하늘과 추석명절이 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삼 십년 전만 해도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온갖 짐을 싸들고 고생하며 내려가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즐거웠다.

필자는 가을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한창기씨다. 30여 년 전 내가 계몽사로 자리를 옮겨 갔을 때, “자네는 고향을 빛낸 사람이야, 상장기업 사장이 됐으니 말이야” 라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다. 어느 가을 날, 고향인 벌교 뒷산에서 따왔는지 주머니에서 작은 토종밤을 몇 알 꺼내주며 귀중한 보물인양 은근히 자랑하던 모습도 기억에 새롭다. 이번 참엔 그의 산소에도 가볼 예정이다.

빼어난 눈썰미와 미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 이성의 실행력을 갖춘 사람이 한창기(1936~1997)다.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장,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창간한 언론출판인, 골동품 수집가, 외솔회 회원으로 활동한 재야 국어학자, 빼어난 칼럼작가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그는 전라남도 벌교에서 태어났다. 순천중학교시절 미군방송으로 영어를 익혔는데, 서울대학 법과대학 재학 중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일등을 했으며 아버지 부시대통령은 방한할 때마다 통역으로 항상 그를 지명했다, 서른두 살에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1976년 3월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했다. 토박이문화를 섬기고, 민중의 목소리를 앞세우며, 방짜유기, 옹기, 판소리, 한복, 한옥, 차, 염색(쪽)같은 전통문화를 퍼뜨리고자 한 것은 문화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한복사랑은 유별났다. 손 명주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지은 속저고리에서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은 한복차림의 태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만큼 한복의 태가 멋스러운 사람은 본적이 없다. 1997년 2월 3일 저녁 그는 간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스물 두해가 지났어도 많은 이들이 일찍 떠난 그를 아까워하며 그리워한다.

어느 날, TV에서 한창기를 소개하고 있어 젊은 시절의 기억에 마주치게 되었다. 그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해 의욕적으로 이끌어가던 내용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가 동생 한상훈 씨를 보내 필자를 만나자고 해서 삼일빌딩 27층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날 그에게 설득 당해 ’뿌리깊은나무’에 몸담았던 사회 초년병 시절, 많이 아껴주던 기억이 마치 활동사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30대였으니 벌써 40년 가까이 지나간 아득한 옛날 얘기다. 아무튼 그의 한글 사랑과 잡지를 포함한 대중 인쇄매체 가운데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원칙을 도입했던 점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한글 사용뿐만 아니라 잡지 내용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가려워하는 데를 찾아가며 긁어주려 애썼다는 점에서 당시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6년 창간되어 전두환의 신군부 때인 1980년 8월 발행부수가 7만부를 넘던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면서 기껏 4년 남짓에 명맥이 그쳤으면서도 지금껏 이름이 널리 기억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때 ‘뿌리깊은나무’ 는 외부 필자의 원고를 우리말 표현에 맞춰 가다듬는 작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창기의 유별스런 고집이 아니었다면 전문가의 글을 뜯어 고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비평 칼럼을 썼는데, ‘성깔쟁이’라는 뜻의 ‘앵보’라는 필명으로 썼다. 그의 칼럼을 읽으려고 ’뿌리깊은나무‘ 구독자가 되었다는 사람도 많았다.

젊은 시절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바하이‘라는 종교의 선교사와 어울려 다녔다는 그를 전도하려고 입원해 있던 서울대학 병원에 찾아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하나님말씀을 전했다. “그렇잖아도 병원 전도 팀들이 많이 찾아 와서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면서 앞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살겠다고 하셨는데 교회는 출석을 못해보고 하늘나라에 먼저 가셨다. 아쉽다. 언젠가는 추운 겨울 종로2가 불고기집에서 회식을 하던 중 신발장에 벗어놓은 그의 구두가 없어졌는데,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맨발채로 눈길로 뛰쳐나갔다. 성질이 불같았다. 이 가을에 그가 유별나게 보고 싶다.

 

이창연 장로

소망교회
전 CBS재단이사
전 NCCK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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