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소안학교’ 민족 교육, 일제하 항일구국운동의 횃불 밝혀
‘사립 소안학교’ 민족 교육, 일제하 항일구국운동의 횃불 밝혀
  • 김농률 지역기자
  • 승인 2019.09.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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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현실 이길 힘 ‘배움’ 자각
'중화학원'설립, 후에 '소안학교'
일제하 항일 민족지도자 배출
유관순보다 보름 앞서 3·1운동
국내, 일본, 만주에 항일조직 구축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승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3·1운동 100주년, 한국도서()학회(회장 김농오 교수. 목포대)는 지난 8일 국가가 지정한 제1회 섬의 날의 의미를 살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마련된 학회 30주년 학술세미나를 위해 이튿날 소안도를 찾았다.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깊게 서려있는 곳이다.

2차세걔대전 전범국으로 과거 침략전쟁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위안부 만행에 대한 산 자들의 종언조차 부인하며 역사왜곡의 행보를 끝없이 이어가는 일본,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헌법개정에 필사적인 아베와 일본 우익이 그들 안에 사그라들지 않은 침략의 본성을 마침내 다시 드러냈다. 기자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치열했던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라남도 소안도의 역사적 사건을 취재 조명하면서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정신의 굴기를 자각하고,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항일운동의 시작이 된 전라남도의 작은 섬 소안도의 가치를 밝히려고 한다.

1. 항일운동의 시작, ‘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1886)

2. ‘당사도 등대 습격의병 의거(1909)

3. <사립 소안학교> 민족 교육, 일제하 항일구국운동 횃불 밝혀 (1910~)

한일합방 이전 조선은 이미 그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체결은 제도화한 것일 뿐이었다.

남의 나라 영토에 제 집 드나들 듯 들어와 자기들끼리 세금까지 걷어가며 야만 행위를 서슴지 않은 일본제국주의 무리들, 1885년 야마다란 자가 소안도 맹선리에 들어온 일본 어선들을 대상으로 입어세를 걷고, 이를 고발한 일본어민들에게 일본재판소는 그를 무죄 방면하는 기막힌 현실이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이 온갖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조선 조정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급기야 참다못한 소안군도 주민들이 연대해 일으킨 거사가 1886<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이다(본보 64). 이것은 앞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날 항일운동의 봉수였다.

일제는 1897년 목포항을 강제개항하면서 일본 상선들의 항해를 돕기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제일 먼저 토지조사 사업을 시작했다. 본격적 영토침탈에 들어간 것이다. 소안도도 일제의 수탈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제는 조선 왕실과 친할 목적으로 소안도의 모든 토지 소유권을 왕실의 이기용에게 넘겨주고 수탈의 여세를 몰아갔다. 이로 인해 소안면민들은 하루아침에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소안면민들은 최성태, 김사홍, 신완회를 면민대표로 선임하고 1909<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소>를 정식 제기한다. 그리고 같은 해 일제를 위해 설치되어 있는 당사도 등대를 소안출신 의병 5명이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를 파괴하는 의거를 일으키며 일제에 저항의 횃불을 밝혔다(본보 65).

그러나 소안인들의 이러한 처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면서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5백 년 조선왕조는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울분과 슬픔을 감추지 못한 소안인들은 우리 민족이 힘을 키우는 첫 번째 일이 배움이라는 생각에 1913년 소안도에는 <중화학원>이 김사홍에 의해 세워지고, 항일투쟁의 선봉장이 된 이들이 교사로 부임했다.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가 뿌려진 것도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이었고 많은 투사와 열사들이 배출된 것 역시 이 같은 교육사업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중화학원에는 소안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처음으로 조직화하고 중앙의 조직들과 연대시키는 등 소안 민족해방운동에서 절대적 역할을 맡은 송내호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송내호는 당시 19세의 나이에 비밀결사대인 수의위친계를 조직, 완도읍과 완도 각 면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를 조직대상으로 폭넓은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3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소안도의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 백태윤 등이 완도읍 나봉균,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완도읍 장날 315일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유관순 열사가 아우네 장터에서 41일 만세시위운동한 날보다 보름이 앞선 시기였다.

사립소안학교. 옛 학교 터에 2005년에 복원했다. 1921년 토지반환소송에서 승소한 것을 기념해 1923년 학교를 세웠다. 일제는 1927년 강제폐쇄조치했다. 그러나 사립소안학교는 소안도민들의 자존심이었다.
사립소안학교. 옛 학교 터에 2005년에 복원했다. 1921년 토지반환소송에서 승소한 것을 기념해 1923년 학교를 세웠다. 일제는 1927년 강제폐쇄조치했다. 그러나 사립소안학교는 소안도민들의 자존심이었다. 김농률 기자 

 

이듬해 4월에는 배달청년회가 조직됐다. 1백여 명이 가입된 배달청년회는 이후 소안도 내의 노농대성회와 살자회 여성회 소년단 등과 연대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구상을 결의한다든지 타 지역의 소작쟁의에 대한 금전도 모으고 격려문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송내호는 1921년 대한독립단 사건으로 검거돼 징역 1년 형에 처한다.

1922년 소안면민들뿐 아니라 오랫동안 일제에게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우리 민족에게 통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909년부터 13년 동안 싸워온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소>에서 마침내 소안면민들이 승소한 것이다. 일제하에서 민의 힘으로 주권을 합법적으로 되찾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면민들은 이를 기념코자 소송에 나섰던 면민대표에게 숭덕비를 세워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들은 모두 사양했다.

다시 살아난 기쁨을 맞이한 소안 6천 면민들은 승리기념으로 의연금 1454원을 모아 사립소안학교를 설립한다(1923516). 가학리에 들어선 사립 소안학교는 이후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의 전초기지로서 소안항일운동 단체에 지도급 인사를 배출하는 등 항일사관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일제는 개교 당시부터 소안학교를 자신들의 권력이 직접 미칠 수 있는 공립학교로 바꾸기 위해 설득하고 회유하는 등 갖은 시도를 다 했지만 소아면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예 학교를 폐쇄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결국 1927510일 소안학교는 축제일에 휴학하지 않고,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는 등의 몇가지 이유를 들어 강제 폐쇄조치를 받게 된다.

소안면민들은 곧바로 도 당국에 항의하는가 하면, 사립소안학교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복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는 날로 더해만 갔고, 소안면민들의 항일운동 역시 더욱 조직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1924년 배달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약 7백여 명의 소안 노농대성회 회원들의 제2회 결성대회는 소안인들의 일제에 대한 감정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대회장에 일본경찰이 감시 목적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저 일본놈 순사를 쫓아내라.”고 소리쳤고 결국 추상민은 밖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경찰은 집무방해죄와 협박죄 보안법위반죄 등을 지워 노농대성회 간부 13명을 구금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다음해 징역 6개월부터 1년까지 판결을 받았다. 이것이 소안사람들이 감옥을 내 집 드나들 듯 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감옥에 간 이들을 생각하며 소안도의 많은 이들은 겨울에도 철창의 이웃을 생각하면서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도덕적 불문율이나 다름이 없었다.

1927110일 송내호의 지도하에 비밀결사체 일심단이 조직돼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구국 투쟁할 것을 맹세했다. 이어 215일에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한 거족적 민족 단위의 항일운동체인 <신간회>가 조직됐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내세운 신간회에서 송내호는 창립총회 당일 규칙심사위원 5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이후 조사연구부장직을 맡아 크게 활동했다.

이즈음 일제의 대규모 검거가 시작되었다. 19271120일 소안배달청년회를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하는 대회이자, 사립소안학교 강제폐쇄에 대한 항의집회를 겸하는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일본경찰에 적발됐다.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를 설치하자. 반대단체를 박멸하자. 사립소안학교 복교운동을 후원하자. 민족단일당 수립을 촉진하자. 민족해방운동에 선구자가 되자. 총독부 폭압정치를 대중 앞에 여지없이 폭로하자. 대중에게 정치의식을 각성케 하자.” 일제는 이 선언을 빌미로 배달청년회에 대한 일제검거에 들어갔는데 결국 13명이 구속돼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 여파로 소안 항일운동의 큰 산맥과도 같았던 송내호는 34세를 일기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체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안면민들의 항일운동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소안면민들은 김흥남, 황남옥, 김향남, 정석규 등이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계속된 항일운동을 전개해 한반도 남쪽 끝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맨 앞에 섰던 것이다

1920년대 6천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8백여 명이 일본경찰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혐의를 받은 섬 소안도.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 등지에까지 항일 조직을 구축함으로써 암흑의 조국을 비추는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던 곳, 그러나 일제 침략의 만행과 불법행위를 선봉에서 겪으며 벌떼처럼 일어나 민족의 횃불이 되었던 소안도에 대한 역사 기록은 지금까지 아무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에 가리워져 있었다.

태초에 뜻이 있어 이 한 점 찍을 적에, 하늘이 무너져도 살면서 지켜내라, 나라와 겨레의 등불 너에게 맡겼더니라, 망국의 한을 품고 산천이 캄캄할 때, 옥에 갇히시고 총칼 앞에 쓰러지면서도, 온 몸을 불태워서 이 역사 비췄거늘, 저 바다 바람결에 듣느냐 님의 함성, 오늘도 우리 가슴에 불길로 타오르네, 길이 빛날 그 이름, 민족의 섬 소안이여” (소안항일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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