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④ 관상(觀想)의 수단, 사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④ 관상(觀想)의 수단, 사진
  • 박혁순 목사
  • 승인 2019.09.05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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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에 촉발된 종교개혁이 500년이 경과되었다. 그동안 루터교회, 개혁교회, 감리교회 등을 필두로 상당한 개혁과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친’ 반(反)전통 운동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 대표적 사례를 꼽자면, 지나친 분파주의를 극복하고자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회 등을 포괄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추구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이고, 2천년 그리스도교 예배-예전(禮典) 전통에 대한 심중한 숙고와 회복의 운동도 이에 해당하겠다. 단적으로 개신교 안에서 ‘설교’로 대변되는 말씀 예전의 치우침 현상을 반성하며 ‘성만찬’ 중심의 예전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렸다’는 서양속담을 자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바로 수도원 전통 및 기도법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 ‘우리 열심히 기도합시다!’ 한다면, 대다수 교인들은 시간을 더 들여 ‘주여 삼창’에 두 손을 들고 몸을 움직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면 각자 알아서 기도해야 할 뿐이다. ‘어떻게’라는 관점이 별로 없다. 개신교계의 기도현장을 진작 몸에 익히지 못한 신자라면 각종 기도회 자리에서 소외되거나 자신을 구별시킨다. ‘나는 기도를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개신교회 이외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발전되어 행해져 온 ‘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의 기도법은 신자의 영적 체질이나 기호에 맞출 수 있는 다양한 계기를 선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언어로 영혼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비한 어루만짐을 경험하게 한다. 현대인의 불안과 압박감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게 하고, 타인에 대한 관용과 사랑을 키우고,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새기도록 해주는 등 그 유익이 실로 크다.

관상기도(觀想祈禱)를 뜻하는 라틴어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는 헬라어 ‘테오리아’(theoria)에서 왔는데, ‘바라보다’는 의미에서 왔다. 곧 심령의 눈으로 단순하지만 깊이 응시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충만함을 기다리며 그의 현존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고 기다린다. 일반적인 기도가 내 소원을 하나님을 아뢰는 상향식 기도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정서, 영감, 음성, 이미지 등으로 다가오시는 일종의 하향식 기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사진이 관상기도에 부합하는 기도가 될 수 없지만, 나는 곧잘 잘 담긴 한 컷 한 컷 속에서, 아니 뷰파인더를 통해 보여지는 피사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 및 말씀과 조우하곤 한다. 비록 내 마음 속에 들어서는 것이 성경 구절도 아니고, 신묘한 이상과 비전도 아니고, 밧모섬에 유폐된 요한이 들었던 계시 같은 종류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사진을 통해 내 신앙과 신학에 도전하고 내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메시지를 얻곤 하는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칼럼에서는 내가 촬영한 몇 작품을 소개하며 내 마음에 관상의 자료로 들어온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시장 할머니”
“시장 할머니”

이 작품을 현상하고서 내 마음에 떠오른 성구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였다. 왜 그랬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흑석동 들꽃”
“흑석동 들꽃”

지금은 재개발지역으로 수용된 서울 흑석동에서 촬영한 컷이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 힘겹게 피어난 들꽃과 이것을 들고 있는 소녀의 삶이 비슷하다고 서로 느꼈다. 지극히 작고 연약한 것을 더욱 아끼시는 예수께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바라보실 때 무엇을 생각하실까?

“엄마를 기다리다”
“엄마를 기다리다”

역시 대전의 낙후지역에서 찍은 컷이다. 불과 너다섯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지만 제법 자란 동네 오빠 언니들과 뒤섞여 놀고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 아이를 돌보아줘야 할 어른은 어디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아이는 저런 포즈를 취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은 이 사진을 보는 우리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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