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9월 4일에 독일 출신의 신학자이자 의사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가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슈바이처 박사는 1952년에 인류의 형제를 발전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그는 당대에 신학과 의학 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로 가서 의료봉사를 해야겠다고 처음 결심한 건 1898년 성령강림절 아침이었다. 당시 슈바이처 박사의 나이 23세였는데, 그는 아침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30세 될 때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그 이후에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이후 슈바이처 박사는 30세가 되었을 때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1911년 의학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그 다음 해인 1912년 6월 18일에 헬레네 브래슬라우와 결혼하고 1913년에 열대 아프리카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65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연세대 정미현 교수는 슈바이처 박사가 원래 목사였고, 신학자였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슈바이처 사상 다시보기’라는 논문에서 슈바이처 사상을 크게 하나님 나라, 고난에 대한 이해, 탈식민주의적 선교, 생명 경외의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본 논문에서 정 교수는 슈바이처 사상의 고유함이 가장 묻어나는 사상이 바로 그의 생명 경외 사상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경외는 슈바이처 박사에게 모든 생명을 향한 지극히 높은 사랑의 윤리를 포괄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만이 개인과 인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음악가로서도 아주 유명했는데, 그가 가장 존경한 음악가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다. 슈바이처 박사는 1906년에 바흐에 관한 연구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 : 음악가이자 시인’을 프랑스어로 출간했고, 1908년에 독일어로, 1911년에는 영어판으로 책을 출판했다. 슈바이처 박사는 여러 문제가 많았던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꾀한 당대 최고의 바흐 연구가였다. 이처럼 슈바이처 박사가 보여준 다방면의 천재성은 그가 아프리카에서 자신만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