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논문] 성서의 시각적 읽기 - 대학의 교양교육으로서 성서교육 방법론
[이달의 논문] 성서의 시각적 읽기 - 대학의 교양교육으로서 성서교육 방법론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08.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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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박사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한국교회 현장에서 실천적 함의를 제공하는 논문을 매월 한 편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성서의 시각적 읽기 - 대학의 교양교육으로서 성서교육 방법론

김학철 박사 (연세대학교 부교수, 기독교교양학/신약학)

거룩한 것을 시각화하여 교육에 도입하려는 시도는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Ⅰ, 590-604년 재위)는 성서화(聖書畵)를 비롯한 여러 이미지를 활용하여 신앙교육을 하려 했다. 글을 읽을 수 없더라도 이미지를 볼 수 있다면, 그림은 성서와 신앙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이미지가 성서의 내용을 부연하는 삽화(揷畫)에서 벗어나 책의 중심에 들어서고, 나아가 글자를 주변부로 밀어낸 책들이 발행되었다. 흔히 ‘비블리아 파우페룸’(biblia pauperum)으로 불리는 책들이다. 이것은 독일의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Ansgar, 801–865)가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구약과 신약 성서를 유형론적으로 설명하는 그림이 그 책의 주요 그림이 되었다. ‘비블리아 파우페룸’의 문자적 의미는 ‘가난한 자들의 성서’이지만, 가난한 이들이 살 수는 없었고 교회가 장만하여 교육에 활용하였다. 이후 문자문화의 시대가 시작되고 문맹률이 급속히 낮아지면서 이미지는 신앙 교육의 중심부에서 다시 한 번 멀어졌다. 문자라는 정확하고 신속하며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매체가 그림의 애매모호함보다 성서교육에 더 적합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21세기 인류는 구전문화 시대에서 문자문화 시대를 넘어 영상문화의 시대로 진입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청각’ 중심의 구술문화, ‘글’ 중심의 문자문화를 포괄하면서 공감각적 영상문화가 우리의 인지와 감정을 형성한다. 특별히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환경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그리고 영상문화를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미지는 이러한 매체 환경에서 다시금 중요성을 얻게 되었고, 신앙 교육에서도 성서화를 비롯한 종교 이미지를 새삼스럽게 다시 평가해야 할 때가 되었다. 특별히 대학의 교양교육으로 성서교육을 하는 현장에서 이러한 교육적 요구는 더욱 절실하다.

대학의 성서교육은 변화된 교양교육의 목표와 필요성에 부응하고, 그 과제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논문이 제안한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이와 같은 교육적 요구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다. 먼저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성서라는 인류의 고전에 담긴 신과 인간,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인류의 경험과 지혜가 역사적으로 계승되고, 그것이 예술 분야에서 전유되어 온 방식을 살피게 하여 학습자들이 종교와 역사와 예술의 범주에서 자신과 사회를 조망하고 성찰하며 기획하도록 돕는다. 성서의 메시지가 역사와 예술의 분야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인류의 고전으로서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유의미한지가 드러난다. 이것은 근래 법제화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인성교육에 해당하는데, 인성교육은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자질을 키우는 것인데 성서와 성서-이미지 교육은 이 교육적 필요에 부응하는 적절한 내용을 갖고 있다.

둘째,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융합적 능력을 키운다. 시각적 읽기는 성서라는 고대 문헌 해석 능력과 이미지 독해 능력을 동시에 함양하게 한다. 지금은 구전문화 시대에서 문자문화 시대를 넘어 영상문화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영상문화 시대란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의해 형성된 공감각적 문화 시대를 뜻하고, 그것은 시각 이미지 독해 능력, 흔히 ‘이미지 독해 능력’(image literacy) 혹은 시각화 정보 독해 능력(visual literacy)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문자와 이미지의 교차적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이러한 교육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 나아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하고, 이미지화된 것을 다시 풀어내는 성서의 시각적 읽기 훈련은 문자와 이미지, 나아가 소리를 조합하고 변형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한다.

셋째,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성서나 기독교에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인 교육 대상자에게 교육적 흥미를 유발한다.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즐기면서 그 작품을 탄생시킨 영감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성서의 메시지 앞에 피교육자를 서게 한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피교육자가 성서의 메시지 앞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독려하며, 그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성서에 비추어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을 점검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기독교 대학의 설립 정신을 알리는 목표와 대학의 교양교육으로서의 필요에 응답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제안할 수 있다.

김학철 박사
김학철 박사

연구자와의 인터뷰

대담자 정성경 취재부장

-논문연구의 계기나 연구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에피소드는

2001년에 라파엘로의 ‘변화산상의 예수’라는 그림을 봤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가복음 9장 1-29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변화산상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귀신 들린 아이를 예수께서 고치신 이야기다. 후반부 이야기는 제자들의 무능함과 인간의 비극을 다루고, 전반부는 변화된 예수의 영광을 그린다. 대부분 화가는 이것을 따로 그린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이것을 한 화면에 그렸다. 이 두 부분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20세기 성서의 문학비평을 주도한 분들이 마가복음을 연구하면서 본격적으로 내놓은 주장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고 예술적 직관이 학문적인 지적 고투가 힘들여 가닿았던 곳에 이미 가로질러 간 것 같았다. ‘예술가들의 미술작품이라는 게 성서를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성서 본문에 대한 거대한 해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어떤 성서 장면을 그리려면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예수 얼굴, 몸짓, 손짓, 주변에 있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어떤 구도를 만들지 어떤 색을 쓸지 등등. 성서 본문 하나를 두고 상당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작품을 그릴 수 없다. 이게 하나의 성서 주석이고, 이 주석에는 자신의 해석이 담긴다. 또 한 화가의 해석은 그 시대에 그 성서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성서 해석의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일반 미술학계나 미술 평론가들은 성서학자만큼 성서 주석 혹은 성서 해석으로서 성서화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미술은 잘 몰랐지만 여러 성서화를 보다 보니 ‘아 이분이 성서 본문에 대해서 독창적인 해석을 하고 있구나’하고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는데 굉장히 도발적이고, 새롭고, 자기 나름대로 강한 해석의 방향이 있었다. 기존의 렘브란트와 관련된 글을 보니 내가 성서학자로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지 않도록 하면서 성서 본문과 성서 이미지를 옆에 두고 읽는 것의 유익이 있다. 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예를 하나 들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보내는 장면이 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보내는 장면에 대해 여러 화가의 여러 작품이 있다. 한 부류의 작품은 하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여인과 이스마엘을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것으로 그 장면을 해석한다. 다른 해석은 연민의 눈빛으로 하갈을 그린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볼 때 그는 하갈에게 빵 한 덩어리와 물 한 부대를 주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가혹하게 보여지나. 근래 들어 발견한 다른 해석도 있다. 몇 화가들의 작품에서 하갈은 쫓겨나지 않고, 신의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의 집 밖으로 나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먹을 쥐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집을 나가는 거다. ‘어떻게 이런 식의 상상하게 됐지?’라는 생각에 성서 본문을 다시 상세히 읽다 보니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같이 성서 본문을 통해서 성서 이미지를 해석하고, 다시 성서 이미지를 통해서 성서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해석의 선순환이 생긴다.

성서본문과 성서이미지를 병렬로 두고, 교차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결과를 예술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성서의 시각적 읽기’라는 말로 표현했다. 일종의 예술 체험인데, 성서 읽기와 성서이미지 읽기의 결과를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퍼포먼스 비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사무엘 박(Samuel Bak)이라는 유대계 화가를 아마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에서 수용소에 자기 가족이 다 있었는데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분이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는데 그 중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패러디한 그림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아담은 태어나자마자 아주 균형 잡히고 잘생긴 젊은 남자다. 신이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박의 ‘인간의 창조’를 보면 굶주릭 지친 유대인 포로가 ‘없이 계신 하나님’ 앞으로 손을 내민다. 하나님은 포탄에 맞아 부서진 벽이 만든 빈 공간에 ‘간신히’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생각했다. 으레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의 천지창조처럼 장엄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멋지게 생각한다. 그러나 창세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기록된 것이다. 문서 및 구전 전승이 그전에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창세기로 정착된 것은 바벨론 이후에 기록됐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의 생각이다. 전쟁포로로서 창세기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자가 인간 창조에 관해 쓸 때 그 외부 환경은 어느 것이었을까? 바벨론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할 때, 자기 자신이 끌려온 노예들이지만 우리 모두 다 신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존재라며 바벨론 사람들의 모욕과 경멸의 시선을 거부하려는 신앙의 몸부림을 우리는 인간 창조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본 논문을 통해 목회현장 혹은 대학교에서 적용하거나 성찰할 점이 있다면

예배모임에서도 성서이미지를 이용할 수 있다. 영상매체에 익숙한 대학현장에서 글을 읽으라고 요청할 수도 있고, 이미지를 통해서 사고하게 할 수도 있는데, 교회에서는 시각적 상상력을 동원한 성서 읽기가 성서의 세계로 청중, 독자들을 새롭게 초대한다. 로마 가톨릭은 바로크 예술을 통해 신앙을 공고히 하려 했다.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는 예수’ 등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의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관객이 참여하게 된다. 글도 우리가 읽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는데 시각화 하는 것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또 어떤 본문을 읽더라도 상상을 하게 하는데 그것이 성서의 시각적 읽기의 힘이다. 교회에서도 성경공부나 설교시간에 사용하거나 교회 공간에서 신앙을 형상화할 수 있다.

어느 교회 갔더니 애찬실에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걸어놨었다. 비장하고 엄숙한 장면을 보면서 힘들어서 어떻게 밥을 먹겠나. 꼭 어떤 성서화를 걸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이미지화할까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것이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예배를 귀로 한다. 청각 편중적이다. 한국개신교는 시각문화가 현저하게 부족하다. 청각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파이프오르간부터 해서 성가대에 교회 예산을 쓰는 것을 보면 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사람에게 오감이 있는데 한국 개신교는 주로 듣는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면서. 가톨릭이나 정교회 전통은 인간이 가진 오감을 다 동원해 신앙을 알리려 하는 것과 대비된다. 오감을 통해서 신앙이 체화되는 건데 우리는 맨날 귀로 듣고 생각하라고 한다. 그런 것은 발달했는데 다른 감각에 대해 전혀 배려가 없다. 그런 면에서 시각화는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하게 역할을 해온 것이다.

논문의 핵심 메시지와 목회 현장의 실천적 함의는

개신교는 청각만 있다. 여기는 세속의 공간이 아니라 성의 공간,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라는 시각화가 없다. 개신교는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이미지 문해력을 목회자가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능력이다. 문명의 시작부터 종교와 이미지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미지가 워낙 세서 나중에는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지 마라”고 경계하는 말씀도 하신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성육이라는 것은 육체를 입었다는 건데, 신이라는 무형적 존재가 살덩어리를 입는 육체가 되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이미지의 정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신앙적 근거다.

신학대 커리큘럼을 보면 교회 음악과 관련된 것은 있지만 시각 이미지에 대해서는 배우는 시간이 없다. 교회 미술, 교회 관련 시각예술과 관련된 과가 없다. 배움이 없는 거다. 개신교가 시각이미지를 멀리하게 된 계기들이 있다, 종교개혁 때 미신적인 성상숭배가 세니까 루터나 칼빈이 멀리하면서 시각적 이미지가 멀어진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길들이면서 가야지 시각적 이미지를 배제할 수 없다.

목회자가 스스로가 교회가 신앙을 보여주고 나타내는 시각화할 수 있는 건물로 꾸밀 필요가 있다. 포항에 한 교회를 갔는데 복도에 다른 모습의 예수님 그림이 쫙 걸려있는 것을 봤다. 뛰어난 작품들은 아닌데 보고 좋았다. 매우 다양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을 보여준 거 아닌가. 신앙의 다양성과 상대방의 신앙을 존중해주고, 내가 모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주고 그런 것을 하는 자체가 신앙교육이고 말하지 않는 설교다.

기독교교양학회가 설립됐다. 기독교교양학이 추구하는 목적과 과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것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는가

한국기독교교양학회는 기독교 교양학 혹은 교양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인 학회로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교양교과목을 실제적으로 후원하고 학문적으로 기독교교양학을 정립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학회이다. 학회는 비종교적 언어, 곧 보편의 언어로 기독교를 해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심화 및 확장하고자 한다. 목회현장에서는 신학무용론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신학대학에서 배우는 언어가 삶과 유리된 서구 신학의 용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교양학은 일반 목회현장에서, 삶의 구체적인 언어로 그러나 매우 정제되고 숙고된 언어로 우리의 진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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