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 의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항일 민족의식 분출
1909년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 의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항일 민족의식 분출
  • 김농률 지역기자
  • 승인 2019.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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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 압력 받은 조선정부 등대 설치
일제를 위한 등대, 침략의 길잡이 역할
소안 의병 5인 등대 기습 의거 결의
일본인 등대수 4명 살해, 등대 파괴해
주권 침탈 저지한 백성의 피맺힌 절규
역사적 재평가, 사료 발굴 연구 요구돼

소안도는 한반도의 남쪽 다도해의 최남단(완도군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제주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서해안 또는 중국대륙으로 향하는 대한해협의 문호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여 국제관계에서 특히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역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도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지녀온 섬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소안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을 더욱 재고시켜주는 것으로 현해탄을 건너 소안도를 찾아오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가 자리하고 있어 훌륭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서도는 동경 127°5‘, 북위 34°7’에 위치한 면적 2,51㎢의 섬이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산의 봉우리가 해발 362m여서 일본인들이 소안도 출가어업 기지를 찾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이 섬을 보고 항해를 했고, 그 곁에서 육안으로 관찰되는 소안도를 관찰하며 당사도를 향해 항해를 하면 바로 소안도의 맹선리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 곳 당사도에서 1909년 소안도 주민들의 ‘의병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일본인들은 당사도를 항문도(港門島)라 불렀다. 조선의 육지에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다는 의미이다.

본보 지난 호(64호)에 보도한 1886년 <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 이후 일제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에게 있어서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전라도 소안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일본인들이 만든 해도상의 소안도 맹선리 해안짝지의 이동성 임시부락을 일본어촌으로 명기하는가 하면, 1897년에는 목포항을 강제 개항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고종 42년(1905년) 11월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함)을 체결해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로 인해 소안도 맹선리의 일본어촌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인의 한국 이주는 그들의 자의로 아무 제약 없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뒤이어 1908년(순종2년)에는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인도 한국인과 똑같은 조건으로 어업권을 인정받게 됨에 따라 한해 출어 출가어업도 통어시대에서 이주정착어업시대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통어시대의 한해 출가어업 전진기지로서 주요 기능과 역할을 담당했던 맹선리 해안짝지의 일본어촌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됨으로써 한일합방 직전후로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한편, ‘항일운동의 성지’답게 소안도에서는 갑오동학혁명 당시에도 이미 반봉건 반식민운동이 타오르고 있었다.

1894년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때 소안도 사람들은 동학군에 합류하거나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동학혁명에 참여한 접장 7명을 소안도에서 체포해 처형했다. 1894년 12월 16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이강욱, 이순칙, 나민홍 3명을 총살하고, 박경삼 등 4명은 거문도 첨사 권동진에게 죽도록 맞은 후 돌려보냈다고 <갑오동학혁명 군정실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 살아 나온 이들이 이후에 발생한 당사도 등대 습격에 가담했다.

당사도에 세워진 등대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 상선의 항해를 돕기 위해 우리 정부가 설치했는데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1909년(순종3년) 1월 14일 당사도에 등대와 무적을 새로 설치하게 해 야간이나 안개에도 항해를 수월하게 했다, 등대의 설치로 인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어업침탈 강도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구한국정부가 해결해 준 셈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당사도 등대 시설이 이곳을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공익시설이라 했지만 당시 소안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소안도 주민들의 시각에서는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순전히 왜인들을 위해 세워진 시설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어업 침탈의 길잡이 역할만 톡톡히 수행하는 ‘괴물’로 보였던 것이다. 실재로 일본은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 각종 풍부한 수산물과 쌀, 면화 등을 수탈해 갈 목적으로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당사도에 등대를 세웠다. 이에 1909년 2월 24일 소안도 비자리 출신 이준화 외 5명이 이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수 4명을 현장에서 처단하고 당사도 등대를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수탈의 상징인 등대를 파괴하는 항일운동이 바로 1909년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 의거>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외교권은 물론 치안경찰권, 사법권까지 쥐고 있던 일제당국에 의해 이들 모두 체포되어 청산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으로 「전남의 섬」(전라남도, 2002)은 밝히고 있다.

당사도에 일제를 위해 만들어진 등대가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에 격분해 동학군에 가담했던 소안도 의병들이 습격해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이 등대를 파괴했다. 사진은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모형. 김농률 기자
당사도에 일제를 위해 만들어진 등대가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에 격분해 동학군에 가담했던 소안도 의병들이 습격해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이 등대를 파괴했다. 사진은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모형. 김농률 기자

김승 한국도서(섬)학회 고문과 진상대 교수(경상대 수산경영과)는 공동논문에서 구한말 일본제국주의의 계획된 침략의 야욕을 따라 조선침략의 전위대로 둔갑한 일본어민들이 소안도에 대거 들어와 각종 불법행위를 총동원해 영토를 유린하고 어장과 해양자원을 침탈하는 행위를 저지하고자 저항한 1886년의 <소안도 왜인 주거지 방화사건>과 1909년의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 의거>는 단순한 의미의 일본어민들의 불법부당행위에 대한 소안도 주민들의 소요사태나 피살사건의 차원을 넘어 소안도 주민들이 주도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온 몸으로 저항하고 항거했던 항일운동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한말 국권침탈의 명운을 목격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소안도 사람들,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어업 침탈의 속도를 차단하려는 소안도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였다.

당사도 등대 경내에는 당시 왜인들이 기록해 놓은 조난기념비가 우리의 항일전적비와 함께 세워져 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회장 이대욱)는 매년 이 의거를 재현하는 행사를 열어 역사를 기념해 오고 있다.

한편, 이듬해 1910년 순종4년 8월 22일, 치욕의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고 8월 29일에 이를 선포, 순종이 양위조서를 내림으로써 대한민국은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이 스스로 방위대를 조직 운영하여 왜구의 침입예방에 힘써 주민들의 생활이 편안하게 되었다 하여 이름했던 소안도(所安島), 그리고 소안사람들. 이후 전개 될 경술국치의 뼈아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일운동과 국권회복을 향한 꺼지지 않는 횃불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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