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 항일운동의 시작이었다!
‘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 항일운동의 시작이었다!
  • 김농률 지역기자
  • 승인 2019.08.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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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민들 소안도서 불법조업, 야만 행위 일삼아
1886년, 소안 주민들 연대해 일본어촌 기습 불태워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져 있던 최초의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불씨 소안도서 타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3·1운동 100주년, 한국도서(섬)학회(회장 김농오 교수. 목포대)는 지난 8일 국가가 지정한 제1회 섬의 날의 의미를 살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마련된 학회 30주년 학술세미나를 위해 이튿날 소안도를 찾았다.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깊게 서려 있는 곳이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과거 침략전쟁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위안부 만행에 대한 산 자들의 종언조차 부인하며 역사왜곡의 행보를 끝없이 이어가는 일본,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헌법개정에 필사적인 아베와 일본 우익이 그들 안에 사그라들지 않은 침략의 본성을 마침내 다시 드러냈다. 기자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치열했던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라남도 소안도의 역사적 사건을 취재 조명하면서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정신의 굴기를 자각하고,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항일운동의 시작이 된 전라남도의 작은 섬 소안도의 가치를 밝히려고 한다.

1부- 항일운동의 시작, ‘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1886년)

2부-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 의거(1909년)

3부- <사립 소안학교> 민족 교육, 일제하 항일 구국운동 횃불 지펴(1910~)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소안노인회가 모금활동으로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세웠던 것을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 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면서 기념탑을 다시 건립했다. 김농률 기자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소안노인회가 모금활동으로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세웠던 것을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 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면서 기념탑을 다시 건립했다. 김농률 기자

감옥에 간 철창의 이웃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안도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격렬했던 곳 중의 하나인 전남 소안도, 암울했던 시절 소안사람들은 그랬다.

완도에서 뱃길로 50분, 포구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항일성지 소안도’라 새겨진 비석이 기자를 맞이했다. 이 섬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동쪽으로는 청산도, 북쪽으로는 완도, 서쪽으로는 노화도와 보길도, 남쪽으로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 3,00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로이 살고 있다.

소안도는 근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어업 침탈 과정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극심한 침해가 있었으나 이제까지 구체적인 내용들이 사실대로 밝혀진 것이 없었다. 기자가 한국도서(섬)학회 회원들과 함께 소안도를 찾은 이유다.

한국도서(섬)학회 회원들이 국가 지정 제1회 섬의 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9일 항일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민족의 섬' 소안도에 모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한국도서(섬)학회 회원들이 국가 지정 제1회 섬의 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9일 항일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민족의 섬' 소안도에 모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일본인들이 언제부터 한국 연안에서 어업에 종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조선조 초 세종 8년에 삼포항거왜인(삼포를 개방하여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어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함)이 허용된 시기로 보는 견해와 19세기 말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고종 20년(1883년)에 체결된 한일통상장정과 일본어민취급규칙(이 조약에 의하면 한국연해에 출어한 일본 통어어민들에게도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매우 굴욕적인 협정이었음)에 의해 전라, 경상, 강원, 함경의 4개도 연안어장을 일본에 개방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김승 한국도서(섬)학회 고문에 따르면 한국학자들은 일본어민들이 한국 연안어장에서 어업에 종사하게 된 시기를 19세기 말 한일통상장정 협정체결 이후로 보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일본어민들이 사실적으로 한국연해에 출어하여 아무런 제약 없이 어업에 종사하였던 시기를 고려 말로 인식하고 있다. 협정은 그들이 오랫동안 지속한 밀어행위를 제도적으로 양성화 한 과정으로 본다.

소안도는 당시의 선박규모와 항행수단(돛단배)에서 볼 때 일본의 대마도나 규슈지방에서 우리나라의 서해안이나 중국으로 항행하고자 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제주도에서 일본본토로 항행하고자 할 때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놓여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거문도보다 훨씬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안도 주변의 어장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계절마다 미역, 다시마, 김, 멸치, 전복, 광어 등이 생산되어 소안도 주민들에게 어업 및 수산업에서 소득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고 이동신 교수(목포대 명예교수)는 말한다.

당시 소안도에서의 왜인들의 출가어업은 모두가 합법을 가장한 불법 밀어조업이었으며, 그들 모두 무식한데다가 난폭한 성향을 가진 자들로 전해진다.

제주도에 들어온 왜인들의 경우 대부분 무기를 소지하고 걸핏하면 살상행위를 일삼았으며, 가축을 비롯해 각종 집물, 어획물 및 채소 등에 이르기까지 훔치거나 강탈하는 경우는 기본이고, 반나체 또는 전나체로 마을을 돌며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겁탈하는 등 풍기문란한 행위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박구병 교수(부산수산대)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당시 전라도의 소안도, 삼도(거문도) 일대에 일본어민 수백명과 동행한 몇 명의 여성들도 연안에 막사를 짓고 거주하면서 잠수기 어업을 비롯한 각종 어업에 종사하였는데, 해지 거주민들이 일본어민의 조약위반 행위를 규탄하며 일본인의 막사를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왜인들의 횡포를 보다 못한 소안도 주민들의 의거였다.

이러한 사실은 1886년 9월(고종 23년) 진주 채취차 전라, 경상도 연해에 입어했던 미국의 Schooner선 선장 앤더슨(C.H, Anderson)의 증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앤더슨에 따르면, "일본어촌에는 일본 출가어민 수백 명으로 부녀자 수 명도 섞여 해변연안에 가옥을 건조하고 거기에서 기거했다. 처음에 가옥을 건조한 다음 일본여자도 함께 주거하여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므로 토착주민들이 방화하여 일본가옥들을 연소시켰다... 근래 일본어민 중에는 어선을 가지고 조선 각처에서 소화를 밀상하는 자가 왕왕 있다고 하니 무슨 방법으로 단속하지 않는다면 한일간 심각한 외교문제로 발전해나갈 소지가 있으므로 이를 철저히 단속하여 재발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보고했다.

그의 <항해일지>는 1874년부터 왜인들이 우리 연안어장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미역, 천초, 우뭇가사리, 전복, 해삼, 삼치, 고등어까지 남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안도 일본인 가옥 방화사건은 우리 연안에서 한일 양국 간의 기본조약을 무시하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 밀어조업을 한 당시 수백 명의 출가어업 종사자들이 기거하는 일본어촌을 맹선리 부락민들이 그들의 주거지를 기습하여 집단시설 가옥들을 방화한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범법행위자에 대해서 치외법권이 주어져 있어 조선정부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본영사관에 이송하여 영사재판에 회부토록 되어 있었으나 일제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한번 실시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버렸다. 또한 왜인들의 조약 위반행위에 대해 조선 정부당국이 철저히 단속하여 이들의 수탈로부터 자국 백성을 보호하고 생업터전도 지켜줘야 했지만 모른 체 할 뿐만 아니라, 과중한 세금만 걷어가는 현실 속에서 소안도 전체 부락대표들이 협의하여 공동으로 대처했던 일제의 거센 침략에 강력히 저항한 주민소요사태였지만, 그동안 우리의 역사 기록에는 아무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었다.

구한말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어업 침탈과정에서 왜인들이 우리 연안에 대거 래침하여 불법으로 거주하며 현지인을 만났다 하면 난동과 살상을 일삼고 살인 약탈까지 감행하는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왜인하면 왜구를 연상하며 두려워하여 무조건 피하던 당시 정서 속에서 소안도의 주민소요사태는 제주도와는 달리, 소안섬 전체 부락이 공동으로 대처해 왜인들의 보복이나 추가 난동, 주민살상, 살인약탈 사태로까지 발전되지 않도록 진정시킨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본격화하기 24년 전, 왜구의 거센 침략의 파도를 타고 조선 침략의 전위대로 둔갑한 일본어민들의 소안도에서의 국토 유린과 어업자원 침탈의 불법행위에 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저지하고 항거했던 1886년 <소안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은 일제의 침략행위에 맞선 최초의 대한민국 항일운동이었다.

이후 소안 사람들의 가슴에 불타오른 민족의식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 상해 등 해외의 항일운동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간 이 나라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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