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영성은 좋은 번역으로부터
깊은 영성은 좋은 번역으로부터
  • 황재혁 객원기자
  • 승인 2018.02.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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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순례 ④ 박상익의 『번역청을 설립하라』를 걷다

지난 500년간 종교개혁의 역사는 성경 번역의 역사였다. 로만 가톨릭 사제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점하고 있었던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여 성경해석의 민주화를 시도하였다. 영국의 윌리엄 틴들, 체코의 얀 후스, 스위스의 츠빙글리, 독일의 마르틴 루터 등은 그리스도인의 깊은 영성이 좋은 번역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자국어 성경을 읽고 교회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이 아닌, 성경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소위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이라고 불리는 킹제임스성경(KJV)은 1611년에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다. 킹제임스성경은 당시 영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들이 번역한 성경이다. 역자를 대표해서 마일스 스미스는 킹제임스성경의 역자 서문에 이러한 글을 남겼다.

 

성경을 번역한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에 있는 영혼의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 번역은 창을 열어 어두운 실내로 빛이 들어오게 해주었고, 껍질을 깨어 그 안에 든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성경 번역은 휘장을 열어젖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고,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듯이 우물 덮개를 열어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루터 성경 위에 성경을 들고 있는 루터 모형, 픽사베이 갈무리
루터 성경 위에 성경을 들고 있는 루터 모형, 픽사베이 갈무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좋은 번역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다. 그런 점에서 박상익 교수의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번역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깨우는 예언자적 소책자다. 박상익 교수는 이미 2006년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번역의 가치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책을 내고도 한국 사회에서 번역이 저평가 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박상익 교수는 그동안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가려 뽑아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머리말과 맺음말을 포함해 총 17개의 짧은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머리말이다. 이 책의 머리말은 영어로 원서를 읽을 수 있는데 왜 번역하냐는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박상익 교수는 인간이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대부분의 한국인이 영어로 된 책을 읽고 공부한다면 그 공부의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박상익 교수의 주장은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전공과목 영어강의를 통해 충분히 증명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대학교에서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전공과목을 영어강의로 개설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섣부른 영어강의의 문제점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 수업을 통해 전공지식을 심화 시키기는커녕, 영어 듣기나 영어 번역에 헉헉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대학교 영어강의는 전공에 따라서 신중하게 개설되어 야지, 단순히 학교의 레벨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강의자나 수강자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한국 학계에서는 학자는 당연히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저자는 바로 옆 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학자가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독창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보기에 일본은 좋은 책이 일본어로 빨리 번역되기에 자국어 책을 읽고도 노벨상을 타는 것이 가능하다.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말하는 200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가 그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마르카와 도시히데는 영어를 너무 못해서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에 나가 본 적도 없었지만 일본어 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가능했다. 한글로 된 컨텐츠가 부족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박상익 교수는 번역이 전기와 도로처럼 국가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간 출판사에 번역을 맡겨 놓았을 경우 상품성이 없는 인문학 고전은 거의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이 있지만, 여기서 지원하는 1년 예산이 20억 원 남짓이기에,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에 불과한 지원으로 양질의 번역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박상익 교수는 2018년 1월 8일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안타깝게도 이 청원은 20만 명의 동의자를 얻지 못하고 9417명의 동의를 받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청원을 시도한 것 자체가 한국사회에 의미 있어 보인다. 국민청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미개한 중세 유럽은 선진 이슬람 문명의 학문적 성과물을 대대적으로 번역함으로써 스승인 이슬람 문명을 추월하고 나아가 근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사건이지요. 번역을 통해 후발 문명이 선진 문명을 추월한 대표 사례입니다. ‘번역 왕국’ 일본에는 전 세계의 지식이 거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번역되어 있어서, 모국어만으로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번역은 일류 국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선행 조건입니다. 번역은 국력입니다.

 

5. ‘번역청’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국립번역원’도 좋고 ‘번역위원회’도 좋습니다. 번역을 시장에 맡길 수 없습니다. OECD 가입국 중 일인당 독서량 최하 수준인 한국의 출판 시장은 꽁꽁 얼어붙은 빙하기입니다. 번역에 뜻을 둔 우수 인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21세기 지식 정보 사회에서 지식이 고갈된다면 나라의 장래를 낙관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정부 개입과 지원만이 악순환에 빠진 번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번역을 도로, 항만, 철도, 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인식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번역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에서 박상익 교수의 번역에 관한 열정은 종교개혁가들의 성경에 관한 열정에 버금간다. 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독일성서공회(Deutsche Bibelgesellschaft)는 루터성경(Luther Bibel)을 2017년판으로 새롭게 출판했다. 독일교회는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휘황찬란한 교회 건물을 세우는데 드는 돈의 일부를 성경 번역에 지원하였다면, 그리고 은퇴목사의 전별금으로 주는 돈의 일부를 신학 책 번역에 지원하였다면 과연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학문적으로 더 성숙하지 않았을까?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150쪽 남짓의 얇은 책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탄식과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의 독서는 그 자체가 기도이며, 구원의 여정이며, 진리를 향한 순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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