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여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주신 법을 락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내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고 제철 따라 열매맺으리.” (시편 1편 1-3절, 조선어성경)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 중에 한권일 것이다.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가장 유명한 시를 하나 꼽자면 아마도 사람들은 ‘서시’를 꼽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세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한편의 시에 윤동주 시인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서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대문이며, 그의 시를 여는 열쇠와 같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그의 시로 들어가는 대문이라면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대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 150편으로 편집된 구약의 시편은 편집자의 의도 없이 무작위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과거에는 시편 150편의 시를 하나하나씩 주제별로 살펴보는 연구가 유행했다면 요즘에는 시편 150편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편집자의 의도를 살펴보는 연구가 유행하고 있다. 시편 150편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살펴보는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시는 단연코 시편 1편일 것이다.
시편 1편은 의도적으로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대조한다. 조선어성경에서는 시편 1편이 “복되여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시편 1편에서의 복은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죄악의 시공간을 벗어나 여호와께서 주신 법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시편 1편에서 의의 길을 걷는 사람은 단수로 나타나고, 죄의 길을 걷는 사람은 복수로 나타난다. 즉 복 있는 사람은 홀로 있지만, 죄악을 행하는 사람은 무리지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영적 소수자’의 길을 걷는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내가에 심어진 뿌리 깊은 나무와 같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시편 1편에서 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츠’이고, 겨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모츠’이다. 이는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시편 1편은 시편의 독자들에게 ‘에츠’가 될 것인지 혹은 ‘모츠’가 될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창조주이자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은 ‘에츠’ 아니면 ‘모츠’이다. ‘에츠’와 ‘모츠’의 분기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있다. 지금 우리는 뿌리 깊은 ‘에츠’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뿌리 없는 ‘모츠’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