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⑦대구제일교회, 성도와 학생,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
[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⑦대구제일교회, 성도와 학생,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0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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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대구만세운동 중심에 선 교회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교회와 학교
만세운동의 주역이 된 그리스도인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구만세운동. 1937년 완성된 대구제일교회 예배당(현재 선교관)에 만세운동 체험을 위해 전시된 그림. 정성경 기자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독립선언서 중 공약 삼장)

1919년 2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이갑성이 대구에 내려왔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세례 받고 당시 세브란스 약제실 책임자였던 그는 당시 대구제일교호 이만집 목사에게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알리며 대구를 대표해 서명을 부탁한다. 하지만 이만집 목사는 당시 상황에 만세운동으로 독립이 어려울 뿐 아니라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주둔하고 있어 큰 희생이 있을까 판단해 거절한다.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만세운동이 시작된 가운데, 3일 이만집 목사는 의전학생 이용상으로부 200장의 독립선언서를 받는다. 이 목사 손에 들려진 독립선언서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골방에서 학생들에 의해 등사되어 대구와 경북지방 곳곳에 보내진다.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전날, 대구에 비가 내렸다. 1919년 3월 8일 토요일, 오전부터 서문시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구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 교인들과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원 학생과 교사 등 기독인들이 다수였다. 오후 2시경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약 200여명이 서문시장을 향하여 뛰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김태련 조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던 찰나 일경에게 뺏겼다. 함께 소달구지에 올라가 지켜보던 이만집 목사가 들고 있던 공약삼장을 낭독하고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다. 각자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물에 젖어 질퍽이는 시장 길에 고무신이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시장에는 순식간에 1천 여 명의 군중들이 함께했다. 당황한 일경은 대구헌병대와 제 80연대 군인을 동원했다.

시위 대열은 경찰의 제지에도 앞으로 나아갔다. 현재 동아쇼핑 북쪽에 위치했던 남성정 파출소를 거쳐 현 대구백화점 부근인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제80연대가 기관총을 준비하고 그 뒤로 무장한 일본군이 착검된 총으로 시위대를 겨냥했다. 그리고 무장한 일본 군경은 시위대에 달려들어 구타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157명이 검거되고, 71명이 실형을 당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16세에서 49세까지 목사, 장로, 조사 등의 교회 지도자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의 교사, 계성학교, 대구고보, 동산성경학교의 학생, 농민, 상인, 수공업자, 병원 근로자 등이었다. 이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3년 이었다. 이게 대구의 제 1차 만세시위였다.

3월 9일 오후 3시에도 계성학교 학생들과 군중 150여 명이 달성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했으나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연이어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학생 6명, 대구고보 학생 2명, 시민 5명은 3월 10일 4시 30분 경 또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진행되다가 해산당하고 이날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제2차 만세 시위에서는 65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9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에서 1년 형을 받았다. 실형 선고를 받은 인물은 계성학교 학생 2명과 대구고보 학생 2명, 농민 2명, 상인 2명, 수공업자 1명이었다. 연령은 20대가 대부분이었으나 56세의 고령인 농민도 있었다.

3.1운동 당시 교회와 성도들. 정성경 기자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된 독립선언서

폭발적인 부흥으로 민족운동 촉진

올바른 신앙교육, 신앙운동이 과제

불안한 국내정세 속 대구에 복음을 심은 선교사들

대구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건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다. 미국메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1년 1월 부산에 도착해 부산선교지부를 설립하고 경상도의 선교를 담당했다. 1893년 순회전도 여행 중 대구를 방문하면서 최초로 복음을 전했다. 대구제일교회는 처음 방문한날인 1893년 4월22일을 창립일로 정하고 있다.

베어드 선교사의 청원으로 1895년 11월 대구선교지부를 승인받았는데 그 당시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등으로 국내정세가 심히 불안해 미국공사 알렌(H.N.Allen)은 선교사들의 신변보호가 어려워 내륙지역 선교기지 설치를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1896년 4월 베어드 목사는 가족과 함께 대구에 부임했으나 그해 11월 서울선교지부 교육담당 고문으로 대구를 떠났다.

안의와 목사와
안의와 목사와 사모

그리고 1897년 11월, 아담스(Edward Adams) 선교사가 부임해 최초로 개신교 예배를 시작했다. 아담스 선교사는 1898년 12월 7명의 기독교인으로 야소교회(耶蘇敎會)를 조직하고 조사 김재수와 함께 제1회 당회를 개최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선교활동 강화를 위해 1899년 브루엔(H.M.Bruen)선교사와 사이드보담(R.H.Sideobotham) 선교사를 대구선교지부로 발령해 본적적인 전도활동이 시작되었다.

브루엔 선교사는 대구 선교 초기에 부임해 아담스 선교사를 도와 동산선교기지의 터를 닦고 여러 시설들을 구축했으며, 대구제일교회 2대 목사로 재임했다. 1915년 9월에 남산교회를 분립해 교회를 신축한 후 초대목사로 사역했으나 대구만세운동 시 시위를 지원한 것이 밝혀서 일제에 요시찰 대상에 오르다 1941년 9월 추방당했다.

아담스 선교사는 복음 선교와 함께 의료선교, 교육선교를 병행했다. 1897년 의사인 존슨 선교사(Woodbridge O.Johnson)가 부임해 미국약방을 개설했으며, 1899년 12월 이 지역 최초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11월 야소교 대남소학교(현 종로초등학교)를 개교하고, 1902년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부마테(Mrs. Martha S. Bruen)는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이 남녀소학교는 1926년 병합해 희도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꿔 교회에서 운영하다 해방 이후 대구시로 이관되어 공립학교인 종로초등학교가 되었다. 1906년에는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를, 1907년에는 부마테와 존슨 선교사의 부인(Mrs. Edith P.Johnson) 두 사람이 여학생을 위한 신명학교(현 신명중‧고등학교)를 개교했다. 학교들을 통해 지역사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제일교회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1875년 경북 월성군에서 출생한 이만집 목사는 1900년 아담스 목사의 전도로 신앙에 입문했다. 계성학교에서 교감을 역임했다. 민족운동에 있어서는 이갑성의 영향을 받았다. 1909년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장로로 장립해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경북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되어 남산교회, 남성정교회에서 목회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1921년까지 수형했다. 1923년 경북노회는 선교사들의 교회로부터 자치를 선언했다는 이유로 이만집 목사를 면직시켰으나, 2005년 다시 복권시켰다.

대구 초기 네 분의 목회자. (왼쪽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 교회 제공
대구 초기 네 분의 목회자. (왼쪽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 교회 제공

대구제일교회 안에 YMCA가 있어 민족운동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선산 해평에서 1919년 4월 3일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주모자였던 최재화 목사와 시인이면서 기독소년들에게 이상적인 농촌소년의 꿈을 심어준 농민 운동가 유재기 목사로 이어지며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

아담스 목사가 세운 계성학교는 학생들을 과학적 또는 영적으로 교육해 학교나 교회, 일반사회에 기독교적인 선구자가 되게 함과 동시에 기독교 선교의 역군이 될 인재양성에 목적을 두 고 세워졌다. 이 학교 백남채 교사는 신정교회 장로였다. 1888년 경북경산에서 출생한 그는 대구만세운동 당시 계성중학교 학생의 동원을 담당해 앞장섰으며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학교 김영서 교사 또한 만세시위를 함께 주도해 대구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협의로 2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외에도 최상원, 권의윤, 최경학 교사가 대구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1918년 신명여학교 졸업생 사진. 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임봉선. 신명고등학교 제공

“하루는 상급생 언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이 운동에 나가서 동참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성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이방 저방에 쫓아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기와 그날에 입고 나갈 의복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내용은 대구 3·1운동 만세 시위 당시 신명여학교 2학년에 재학했던 김학진 할머니의 회고록 중 한 구절이다.

신명여학교 학생 가운데 20여명이 대구만세운동 현장에서 체포됐다. 2주 후 대다수 참가자들은 석방됐지만 만세시위 참여를 주도했던 이재인과 임봉선은 징역 1년 형을, 이선애는 징역 6개 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명여학교의 만세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활동을 통해 계승돼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네번째 건축된 대구제일교회. 정성경 기자 

 

‘그때처럼’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앙전수를 위해

매년 3월 1일에는 대구제일교회(박창운 목사)에서 대구기독교총연합회와 대구장로회총연합회가 ‘3.1절 기념예배’를 드린다. 예배 후 2천여 명의 성도들이 대구제일교회에서부터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까지 시가행진을 하면서 3·1운동 재현 퍼포먼스도 펼친다.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로서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의미와 책임을 새기는 자리가 된다.

대구제일교회 안에 기독교역사위원회가 있어 새로운 역사적 사료들을 모으고, 임직 때마다 하루는 교회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회 안에 마련된 역사관을 통해 교회학교부터 온 성도와 지역주민, 방문객들까지 복음이 전개된 역사와 독립운동과 교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교회가 3.1운동에 선각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임병규 장로는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신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권오현 은퇴 장로는 “대구에서 최초의 교회였고, 학교, 병원 등 근대 문화가 교회를 통해 이뤄졌다”며 “앞서가는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깨어있는 쪽이라 교회를 통해 3.1운동이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한국교회에 대해 “살기 편해져서 그렇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권 장로는 “한국사회가 세분화되면서 각자 원하는 바가 달라진 것 같다”며 “3.1운동 당시에는 하나의 조선이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일치운동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창운 목사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물량, 성장, 수불림에 포커스를 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3.1운동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까. 권오현 은퇴장로는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도자 몇 사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평신도들도 같이 각성하고 올바른 신앙교육, 신앙운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운 목사는 “본질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만 가지고 있다면 한국교회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3.1운동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세웠고,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재 교회는 어떤 지도자를 세워야 할까. 박 목사는 “청년사역을 할 당시 그들에게 ‘정말 유명한 사람은 안 나와도 괜찮지만 각자가 그 자리에서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다. 누군가 부러워서 찾아오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한국교회도 따라갈 수 있는 깃발을 흔드는 누군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누군가를 세우는 문화가 되면 좋겠다”며 마음을 전했다.

왼쪽부터 임병규 장로, 박창운 담임 목사, 권오현 은퇴장로. 정성경 기자
왼쪽부터 임병규 장로, 박창운 담임 목사, 권오현 은퇴장로. 정성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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