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만세길, 복음의 길
봄길, 만세길, 복음의 길
  • 옥성삼 교수
  • 승인 2019.02.15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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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남쪽 배화여고 본관 옆 후미진 곳에 필운대(弼雲臺)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 도원수 권율이 아들같이 아끼던 사위이자 훗날 명재상이 된 백사 이항복에게 물려준 집터이다. 북으로 수성동 계곡, 남으론 사직단 그리고 동편으로는 경복궁으로 이어진다. 광해군 때는 인경궁이라는 조선 최대 궁궐이 건축되다 중단된 명당이기도 하다. 춘삼월이면 살구꽃과 복사꽃이 지천으로 피어났기에 한양 최고의 봄맞이 명소가 바로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이다. 세월이 흘러 대한제국 시절 필운대는 스크랜튼 대부인이 정동에 세운 이화학당에 버금가는 배화학당이 들어선다. 미 남감리회가 1898년 파송한 강부인(J.P. Campbell)에 의해 지금의 서울 경찰청 터에 세워진 캐롤라이나 학당이 늘어나는 학생과 건물의 위생문제로 1913년 이곳으로 확장 이전되면서 오늘날 배화여고의 터가 되었다. 기미년 3.1운동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새벽에는 40명의 배화학당 여학생이 필운대 언덕에 올라 다시 한번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이날 먼동이 터오는 시간 사직동 언덕의 남감리교 선교부와 도렴동 종교교회는 물론 옥인동 저택으로 이사 온 이완용과 송석원 터에 수년째 벽수산장을 짓고 있던 윤덕영도 만세 소리에 놀라 아침잠을 설쳤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김경화를 비롯한 24명의 여학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겸재 정선의 필운상화. 출처 : 타논의 세상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겸재 정선의 필운상화. 출처 : 타논의 세상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배화여고를 나와 언덕길로 오르면 한양도성 서쪽 성곽이 나온다. 도성 바로 옆으로 양의문교회가 높이 서있고, 그 남쪽에 남감리회 선교부 사택 두 채가 아직 남아있다. 성곽 너머엔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500살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그곳에 광산 업자이자 AP 통신원으로 3.1만세운동을 해외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 르네상스 풍으로 지은 2층 벽돌집 딜쿠샤(Dilquesa, 기쁜 마음의 궁전)가 있다. 해지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박완서 선생이 어릴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싱아를 찾지 못해 아쉬워했던 현저동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다시 남쪽 월암 공원으로 잠시 걷다보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베델의 집터가 나오고, 이어서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의 독일 풍 양옥이 햇살과 함께 반겨준다.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한국구세군의 첫 영문터(전 덴마크영사관)와 경교장 그리고 돈의문 터와 경희궁을 만난다.

한양의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바로 인왕산 남쪽 기슭 도성의 바깥 순성길이다. 우수를 지나 한강물이 풀리면 버들강아지가 만발한 양화나루로 상륙한 봄바람이 곧장 도성의 새봄을 깨우던 봄 길이 여기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드가 곧장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입성한 복음의 길 또한 이 곳이다. 필운상화의 언덕은 봄가을로 한양도성 45리를 하루에 걸어서 유람하는 순성놀이 중 최고의 풍광이기도하다. 이 길은 도성의 봄을 알리는 풍류의 길이고, 남감리회와 구세군의 미션로드이며 100년 전 3.1운동의 함성이 달렸던 만세길이다. 한반도에 봄을 맞이하는 만세길이 어디 이 곳 뿐이겠는가? 대구 청라언덕, 부산 구포, 화성 제암리와 수촌, 포항 육거리, 천안 아우네장터, 철원, 양양, 경강, 구암 등 전국 수천의 골목이 만세길이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5월 만세운동 집회 1542회에 202만 명 참여, 사망자 7509명, 부상자 4만 5562명, 피검자 4만 9811명, 가옥 소실 724채, 교회당 소실 59채, 학교 소실 2개 이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만세운동은 2000여회에 1년간 1천 만 명 넘게 참여했다고 하며, 기독교인의 체포가 약 4만 명, 투옥 2,190명, 사살 6천여 명이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하여 삼천리 반도 어디에나 봄이 찾아오듯, 우리가 걷는 골목길 어디쯤에도 대한독립만세의 여운이 서려있다.

오지가 아니라면, 내가 사는 마을이 어디든지 십리를 못가서 역사의 터무니(地文)를, 한나절 거리라면 신앙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약간의 수고를 더하면 내가 다니는 교회당을 중심으로 반경 삼 십리 안에는 오랫동안 잊혀 진 역사의 숨결과 믿음의 이야기를 발굴할 수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 소비의 악순환을 멈추고, 골목길에 나서면, 그동안 숨겨졌던 봄 길과 복음의 길을 찾을 수 있다. 100년 전 만세 길에 나섰던 그이처럼, 하루만이라도 우리 동네 골목길 어디쯤에 고적히 숨어있는 봄 길 만세길 복음의 길을 찾아 나서자.

 

 

옥성삼 교수연대연합신학대학원 책임교수크로스미디어랩 원장  가스펠투데이 기획편집위원
옥성삼 교수연대연합신학대학원 책임교수크로스미디어랩 원장 가스펠투데이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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