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 ⑥부산진교회를 통해 꽃피운 항일운동
[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 ⑥부산진교회를 통해 꽃피운 항일운동
  • 권은주 기자
  • 승인 2019.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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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항일운동, 호주 선교사들의 순교정신에서 비롯된 것
일신여학교, 신사참배 거부로 끝내 폐교 명령, 호주 선교사들은 강제 추방
"강철은 굽힐 수 있어도, 강철같은 우리 마음 굽힐 수 없어"
3.1 운동과 항일운동 뒤에는 부산진교회와 호주 여선교사들이 있었다. 부산진교회 전경. 권은주 기자
3.1 운동과 항일운동 뒤에는 부산진교회와 호주 여선교사들이 있었다. 부산진교회 전경. 권은주 기자

일신여고의 3.1 독립만세운동 뒤에는 부산진교회와 세 명의 호주 여선교사들이 있다. 만세운동으로 징역형을 받은 11명의 학생 중 8명이 부산진교회 학생들이었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박신연 교사는 부산진교회학교 교사로도 봉사하고 있었다.

호주장로교에서는 1891년 10월 제임스맥카이(Rev.James H. Mackay) 부부와 멘지스, 페리, 퍼셋이라는 3명의 여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했다. 이후에 무어, 브라운 선교사 등 계속된 여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아와 여성교육과 인권향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산진교회는 여선교사 멘지스(Belle Manzies)에 의해 세워졌다. 멘지스는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까지 30여년을 전도와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후배 선교사들로부터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이후 1900년 10월 왕길지(George O. Engel)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교회의 조직을 갖추게 됐다. 그는 1904년 심취명을 장로로 세우고 부산교회 당회를 조직해 초대 당회장을 맡았다. 현재 부산진교회는 로비에 사료실을 마련해 놓아 역사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놨다. 또 교회 마당에는 멘지스와 무어, 데이비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부산진교회 마당에 있는 데이비스 선교사 기념비. 권은주 기자
부산진교회 마당에 있는 선교사 기념비. 권은주 기자

특별히 호주 여선교사들의 신앙과 삶은 부산진교회를 비롯해 주변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한 대표적인 사업은 학교 교육과 부인 성경반 그리고 고아원 사역이었다. 멘지스는 고아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어학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895년 10월 15일 3년제 소학교인 일신여학교를 설립했다.

멘지스 선교사는 이 학교의 첫 교장이 되어 어린이와 여성교육에 집중했다. 그는 “어린이는 조선의 미래다. 여성을 정복하는 자 나라를 정복한다”는 마음으로 사역에 임했다.

부산진교회 김경석 장로(86)는 호주 선교사들을 통해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사회정의와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3.1 만세운동을 벌였을 때, 실질적으로 그들을 뒤에서 독려한 이들은 호주 선교사들이라고 증언했다”며 “그분들은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일제 관헌 자료에 의하면 3.1 만세운동 당시 데이비스 교장과 데이지 호킹 교사는 거리에서 뛰어다니며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라고 소리치며 만세운동을 독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신여학교에서 선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김 장로는 “일신여학교는 학생들에게 신앙교육, 수업뿐 아니라 산업, 농업기술, 원예를 가르쳤고, 실제 기른 작물을 판매까지 할 수 있도록 해 자립심을 키워줬다”고 말했다.

부산진교회 김경석 장로(왼쪽)와 문두호 장로(오른쪽)가 일신여학교 기념관에서 그들의 신앙과 항일운동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권은주 기자
부산진교회 김경석 장로(왼쪽)와 문두호 장로(오른쪽)가 일신여학교 기념관에서 그들의 신앙과 항일운동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권은주 기자

호주 선교사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개 또한 굳건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정책에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것. 결국 1936년 신사참배 반대로 일신여학교는 폐쇄 명령을 받았고, 1940년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주 선교사들은 일본 정책에 의해 자국으로 추방됐다. 하지만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의 신앙과 삶은 부산진교회와 교인들에게 뿌리 깊게 심겨져 이후 부산진교회를 통해 경남지역에 활발한 항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촉매제가 됐다.

 

부산진일신여학교 호주 여성선교사들. 부산진교회 제공
부산진일신여학교 호주 여성선교사들. 부산진교회 제공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추방당하기 전 호주 선교사들 단체 사진. 부산진교회 제공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추방당하기 전 호주 선교사들 단체 사진. 부산진교회 제공

 

부산진교회를 통해 꽃피운 항일운동

▶ 한라산과 같은 굳은 의지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양한라

부산진교회 교인이자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양한라(1893년 출생. 본명 양귀염)는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중국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노동국 총판을 역임했다. 이때 안창호를 만나 그로부터 한라산과 같은 굳은 의지를 지닌 사람이 되라는 뜻의 ‘한라’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수년 동안 임시정부의 문서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요원으로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여성운동에 투신하여 여성범죄자를 전담하기 위한 여자경찰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여자경찰서가 창설돼 초대 서울여자경찰서장이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에 전쟁고아들과 월남한 생계형 윤락여성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하면서 1952년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 자매여숙을 설립했고, 소외된 여성 정신질환자를 수용하여 동분서주하며 그들을 돌보는데 한평생을 바쳤다.

▶ 통영에서 유치원 교사로 3.1운동 바람을 일으킨 문복숙

문복숙은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진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통영유치원 교사로 봉사하면서 김순이, 양성숙과 함께 태극기 2,000개를 직접 그려 준비해 3.1운동을 주도했다. 거사 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옥중 감상을 물었을 때 그는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길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다 옮기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으나 강철같이 굳센 우리 마음은 굽힐 수 없다”고 했다.

▶ 신사참배 거부로 광복 3개월 전 감옥에서 순교한 최상림 목사

최상림 목사는 1929년 8월 부산진교회에 부임 한 후 1937년 12월 제4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됐다. 1938년 6월 41회 경남노회가 개최될 때 교섭위원장이 “신사참배는 종교상의 문제가 아니므로 신앙양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최 목사는 “교섭위원의 권고는 노회의 양심에 반한다”며 부결시켰고, 교섭위원의 해산을 선언하여 신속히 처리했다. 이로 인해 최 목사는 경찰서로 연행되면서 수난이 시작됐다. 그는 49회나 경찰에 불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이후 평양경찰서로 이송되어 광복을 불과 3개월 앞둔 1945년 5월 6일 향년 58세 일기로 순교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독립의 길임을 깨닫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최재화 목사

최재화 목사는 부산진교회 제11대 목사다. 그는 상해에서 경신학교 교사인 김규식 박사를 만나면서 민족 지도자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힘은 힘으로’라는 무력독립에 관심을 갖고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담했다가 의열단이 공산당과의 유대관계임을 알고 김구 주석 휘하에 들어가 연락과 경비업무를 담당했다. 그 무렵 그는 무력투쟁이나 외교활동을 통해 나라를 찾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새로운 힘을 얻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1942년 부산진교회에 부임했을 때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각종 친일적 종교모임과 행사에 참석하라는 통보에도 최 목사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성결교회단이 폐쇄됐을 때 그 성도들을 수용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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