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병택 장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 받을 수 있어"
[인터뷰] 정병택 장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 받을 수 있어"
  • 정세민 기자
  • 승인 2019.01.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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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동치유하는교회 정병택 장로 인터뷰

화곡동치유하는교회는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 희년을 맞는 화곡동치유하는교회에서 개척초기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정병택 장로를 만나 그의 인생과 신앙에 대해 들었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이 고향인 정 장로는 6.25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바 있다. 이후 운수업을 하면서 교회에 희생 봉사했고, 교단에서도 영등포노회장, 영등포노회장로회장, 영등포노회남선교회연합회장 같은 직책을 맡기도 했다. 대담은 본지 주필 이창연 장로가 진행했다.

대담을 나누는 정병택 장로(왼쪽)와 이창연 주필. 정성경 기자
인터뷰 중인 정병택 장로(왼쪽)와 이창연 주필. 정성경 기자

-농촌 출신으로서 어떻게 서울까지 진출하게 됐는지 인생 여정을 소개해 달라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형님 밑에서 자랐다. 7남매 중 막내인데 다행히도 아버지와 형님들이 교회를 다녀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형수님과 같이 살려면 형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형수 부엌일을 잘 도와드렸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발동기를 사 오셔서 정미업을 하셨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화를 사다주셨다. 그 농구화를 학교에 신고 가면 아이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무렵 여수·순천반란 사건을 보며 참혹한 현실 앞에 비통했는데, 6.25 전쟁이 터졌다. 이때 벌교중학교에서 열세 사람이 혈서를 쓰고 군에 지원을 했다. 순천 1사단 15연대 기갑연대에 배치돼 일주일 훈련받고 출전했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에서 7월 25일에 인민군과 교전했는데, 학도병 180명 가운데 70여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다. 이후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북진했는데 그때 그때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밤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했다. 지금도 7월 25일이 되면 육군본부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결혼은 2대 국회의원이었던 김낙오씨의 따님과 했다. 결혼한 뒤 벌교화물을 창업, 주유소와 보석상으로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자식 교육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다.

-운수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당시 서울 구로동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렸었다. 그때 운수업을 하던 조카를 만나 ‘서울 올라와서 같이 사업하자’는 제안에 1969년 7월 10일 화곡교통을 설립했다. 화곡교통은 화곡동에서 중곡동까지 버스 20대를 운영했는데, 어려울 때라 안내원, 정비사, 운전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또한 내가 기독교인이어서 안내원 기숙사를 만들어 전도사를 사감으로 두고 신앙교육을 시켰다. 버스 앞에는 성경말씀을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최초로 안내원과 운전사 유니폼을 만들어 입혔다. 이 일로 노동부와 서울시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고, 전국에 있는 수많은 버스회사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화곡동치유하는교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1969년 7월 10일 버스를 개통했을 때만해도 화곡동은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했었다. 집도 별로 없었다. 출석할 교회를 찾다가 조그만 건물 2층에 있는 화곡동교회를 찾았다. 10월 첫 주부터 화곡동교회를 출석했는데, 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20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또한 당시 담임목사와 대화를 하는데, 교회를 7월 6일에 개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버스개통 3~4일 전에 개척한 교회였다. 그래서 즉시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장의자를 기증했다. 이후 70년 1월 1일부로 나와 집사람, 장모님이 집사로 임명됐고, 재정부장·관리부장까지 맡게 됐다. 그때는 직장 자체가 별로 없었고 취직이 어려운 때라 안내원, 정비사, 운전사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다 화곡동교회로 왔다.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 것이다. 또한 안내원들은 성가대를 하는 등 날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러다 집사가 된지 2년 만에 장로로 임직하라는 말씀을 목사님께 듣고, 당시로서 장로는 꿈도 꾸지 않았기에 거절하였다. 하지만 장로 임직을 거부하는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과 같지 않나하는 목사님의 권면에 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장로로 임직을 하게 됐는데, 그때 주님께 충성 맹세를 했다.

이후 목사님을 따라 심방을 가면 대가족이 방 두 개에서 화장실 하나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 집이 많았다. 당시 화곡동에서 제일 큰 집이 18평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헌금이 너무 뜻밖이었다. 동정을 받아야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헌금을 하는 걸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헌금인데 내가 잘못 사용하면 벌을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결심이 아직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교회 장로는 헌금을 바치는 자리이지 쓰는 자리가 아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교회 돈으로 커피 한 잔 마시고 영수증 처리해본 적 없다. 교회에서 행사 치르고 사례금을 줘도 다시 돌려줬다. 심지어 교회 40주년 기념으로 성지순례 다녀오라고 돈을 줘도 받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다른 장로들에게 비난도 많이 들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로는 헌금하는 자리이지 헌금 쓰는 자리 아냐

십자가의 사랑은 희생,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해야 

-화곡동교회는 다른 교회와 통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를 신축할 때 건축위원장이 되어 교회 부지를 물색할 때였다. 500m내에 같은 교단 교회가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알아보니까 구입하려는 땅 가까이에 영곡교회가 있었다. 통합을 하면 땅을 살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영곡교회 장로님을 찾아갔다. 그 분이 바로 영등포공고 교장 최용찬 장로였는데, 일언지하에 통합을 거절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찾아가 뵈었는데 만주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선을 넘어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갔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의기투합 돼 전격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신앙생활하시면서 어려웠던 적은 없는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운 점은 교회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싸워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74년 교회를 건축하고 성가대 지휘자가 왔는데 문제가 생겨서 담임목사가 사임을 하게 되었다. 담임목사가 사임하면서 근처에 개척을 했는데, 호남 출신 장로가 이북 출신 목사를 쫓아냈다는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죽음에 임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화곡동교회를 떠나기로 하고 용산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이사예배를 드리려고 우리 부부 주례를 맡아주신 이관용 목사님 아들 이용남 목사를 모셨다. 그런데 이용남 목사가 하는 말이 “장로가 그만한 일로 교회를 떠나면 안 된다”며 화곡동교회로 돌아가라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고 다시 화곡동교회로 돌아갔다. 이사 간지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오는데 화곡동에서 제일 좋은 집이 비어 있어 그리로 이사를 왔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걸 몸소 체험한 경험이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자식들이 모두 1남 4녀인데 다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미국에서 셋이 살고 있고, 한국에 둘이 살고 있다. 다들 큰 병치레 없이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작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초청해 손자들까지 다 모였다. 미 해병대 대위가 된 손자만 빠지고 손자 8명이 미국 각지에서 날아왔다. 모두 여섯 군데서 모여와서 축하하고, 감사예배를 드렸다. 정말 행복하고 감사했다.

-화곡동치유하는교회가 50주년을 맞는다.

희년이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희년은 회복이기에 그동안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 상처가 모두 회복되길 바란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화곡동치유하는교회에서 화곡동교회로 회복되길 바란다. 시편 72편 16절에 보면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禾穀)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는 말씀처럼 화곡(禾穀)이 풍성한 화곡동교회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원로장로로서 신앙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희생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희생의 극치이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인 희생은 다 싫어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여유가 생기니까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오만과 아집에 빠져있다. 희생을 실천하지 않고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고 있다. 사랑을 부르짖으려면 낮은 자리에서 희생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천지개벽을 해서 풍요롭게 됐으나 십자가의 사랑인 희생은 싫어하고 사랑한다 말만 하고 있다. 희생의 실천 없이는 교회의 갱신도 부흥도 될 수 없다. 은퇴 후에도 그늘진 곳, 메마른 곳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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