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 ④매봉교회, 어제의 3.1운동을 오늘날 애국운동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 ④매봉교회, 어제의 3.1운동을 오늘날 애국운동으로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01.24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3.1운동과 유관순 열사, 그 역사적인 현장에 매봉감리교회가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교회 네 번째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그 옆에 있는 매봉감리교회를 찾았다.

일본인이 불태운 최초 교회

국채보상운동부터 시작된 민족운동

박해 속에 이어진 신앙의 역사

“유관순을 뛰어넘는 인물을 위해”

매봉교회 지하에 마련된 유관순 열사 전시관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 정성경 기자
매봉교회 지하에 마련된 유관순 열사 전시관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 정성경 기자

불태워진 첫 번째 교회당, 매봉교회와 3.1운동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옛 지명인 목천에 1913년 기록에 의하면 3~4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지령리교회가 현재 매봉교회라고 알려져 있다. 1907년 8월 16일에 실린 대한매일신보에 보면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이란 제목 하에 ‘국채보상의연금 수입 광고’ 지면에 지령리교회 성도 82명의 이름이 실려있다. 국채보상운동이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빚진 1천 300만환의 국채를 갚기 위해 전 국민이 참가한 운동이다. 그 방법으로 우선 국민 모두가 담배를 끊고 그 값을 내기도 했다. 이 운동은 1907년 2월에 시작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 7월, 운동이 일어난 지 1년 4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이때도 매봉교회 성도들의 다수가 앞장섰다. 이들 가운데 지금 알 수 있는 이들은 매봉교회를 두 번째 시작했다는 유성배(일명 유빈기), 유관순의 삼촌인 유중무,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고 참여했다는 유도원, 유기서, 유대원, 교회 속장이며 만세운동 때 앞장섰던 조성택(조인원의 아명)등이다.

그로부터 얼마되지않아 1907년 11월 2일자 황성신문에 ‘일본인이 불태운 최초의 교회’라고 소개된다. 지령리 야소교당이 세워진 이후 1902년부터 일본 군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오다가 1907년에 와서 교회당 15칸이 불태워졌다. 일제 36년 동안 교회당을 파괴한 일은 3.1운동 때 41개 교회였을 뿐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지령리 교회당에 대한 파괴행위는 일체통치 이후 교회에 대한 첫 번째의 일이다.

매봉교회의 두 번째 시작은 1908년 유빈기(柳斌基)로부터였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도처에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을사 의병이 일어났다. 먼저 지식인들에 의해서 항일 언론운동에서 상소(上疏)운동으로 서울에서 시작되어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되자 이러한 의병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일본군이 도처에 파견되어 진정시킨다는 이름 아래 갖은 행패가 극심하던 때, 유빈기는 충남의 중심지인 공주에 들렸다가 때마침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빈기도 거기에 참가했다. 4월 1일 공주시장의 장날을 맞이해서, 오후 2시에 영명학교의 교사 및 재학생 또는 졸업생 그리고 공주교회 교인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유빈기도 참가해 3년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서점을 운영하던 그가 3․1운동 후 모든 서점들을 뒤져 대한 제국시절에 나온 역사책, 사상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다가 불 질러 버려 서점 운영도 차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옥 중 생활에 병을 얻으로 1928년 8월 7일 승천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유빈기와 매봉교회를 함께 세웠던 기이브(奇怡富 E. M. Cable)는 교육 사업에 힘썼다. 초기에는 배제학당 대학부 영어교수를 시작해서 신학회 교수 및 협성신학교 교수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 선교사이다. 또 문서전도에도 관심을 가져 1905년부터는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의 주필로도 활약했다. 그는 일제의 만행을 서슴없이 폭로하며, 친일적인 감독인 해리스(M. C. Harris)에게 항의했던 용기있는 선교사였다.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미 감리교회의 역사', 감리교회의 초기선교사', '신․구약 중간사' 등에 많은 글을 남겼다.

이렇게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 감리교 선교사들을 만난 매봉교회 성도들은 신앙과 함께 민족정신도 함께 성장한다. 매봉교회 성도 중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보면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柳重權)과 부인 이씨(李氏)가 있다. 1919년 3․1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나자, 서울에서 휴교하여 귀향한 딸 유관순의 소식을 듣고, 그 교회의 교인들과 의논한 후, 4월 1일 병천 장터 운동에 참가했다. 이때 유중권은 앞장서 만세를 외치다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부인인 이소제도 운동현장에서 일 헌병의 칼로 난자당해 순국했다. 이 두 부부에게는 1963년 모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인원(趙仁元)은 38세 되었을 때 동리에 기독교가 들어와 믿게 된 다음 온 가족이 믿었으며 속장으로 사역했다. 선교사 기이브(奇怡富)를 알게 돼 그의 소개로 아들 조병옥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녔으며, 3․1운동을 만나 그도 병천 장터 운동에 참가했다. 유중무와 유중권 그리고 아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다 총상을 입었다. 그 후 진천에 있는 영국인 병원에서 3개월 치료를 받은 후 공주 감옥에서 3년의 형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유중무(柳重武)는 1901년 기독교가 이 지역에 들어오자 교회 다니기 시작해 선교사로부터 매봉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임명을 받고 교회 일에 전념했다. 선교사가 오지 않는 때면 예배도 인도하고 심방도 하며 목사 대리 역할을 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을 만나 1919년 4월1일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19년 6월 30일 경성 복심범원에서 3년형을 받았다. 그 후 공주 형무소에서 형을 마치고 나온 후 1950년 4월 7일 83세를 일기로 승천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조병호(趙炳鎬)는 20세가 되었을 때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 병천 장터의 독립만세 시위에 그의 아버지 조인원과 함께했던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6월 30일에 경성 복심법원에서 2년 6월의 형을 받았다. 그 후 1973년 3월 2일에 승천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유예도(柳禮道)는 일찍이 기독교를 믿어오던 중 선교사에게 그의 총명함이 발견돼 이들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 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가할 즈음 그녀도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과 같이 고향에 내려와,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또한 참가했다. 유관순은 잡혔지만 피신한 그녀는 결혼해서 지내는 가운데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기소중지가 내려와 옥고를 면했다. 그 후 1928년에는 충남 청양교회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2년간 일했으며, 1930년에는 박인덕, 신흥우가 주도하던 농촌지도계몽운동 지도원으로 일하였고, 1946년에는 반탁운동 지도원으로, 1947년부터 1950년까지는 애국부인회 지방책임자로, 1960년에는 감리교회 충서지방 금마교회 장로로서 각각 일하였다. 위와 같은 공로로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첫번째 건축 완공된 매봉교회. 홍석창 목사 제공
첫번째 건축 완공된 매봉교회. 홍석창 목사 제공

다시 세워진 교회,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1967년 해방후 첫번째 매봉교회 머릿돌. 홍석창 목사 제공

1919년 4월 1일 병천운동으로 매봉교회당은 사람이 모일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가족은 물론 가문과 동네까지 박해를 받아 ‘예수 믿다 망한 집’, ‘예수 믿다 망한 동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후 조근영(유사)의 집에서 모이다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수신면 장명교회로 갔고 또 일부는 병천 미 감리교회로 갔다. 3․1운동 이후 지지부진했던 교회는 드디어 1930년 5월 19일에 이르러 병천 미 감리교회당, 매송리 미 감리회 예배당, 화덕 미 감리교회당, 지령리 미 감리교회 등이 포교소 폐지계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을 가르쳤고 그녀에게 애국정신을 심어 주었던 박인덕 선생에 의해서 1947년 8월 유관순 기념 사업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사업회를 통해서 영화, 전기 등이 만들어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유관순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2년이 지나 1962년 이화여고에서는 유관순을 기리는 사업의 일환으로 동창회가 그가 살았던 지령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동창회의 후원으로 조직한 M.R.A(진주클럽)가 매해 방학 때면 내려와 농촌봉사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이 기본이 되어 1966년 임지웅 목사가 천막을 치고 또 다시 개척을 시작했다.

1966년 이화여고에서는 개교 80주년을 맞이해 지령리에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하였다. 건립위원회가 조직되자, 1966년 5월 1일 기공식을 가진 후 모금운동을 시작했으며 1년 4개월 만인 1967년 9월 11일 공사를 시작해 11월 11일에 준공했다. 교회 대지 200평 위에 교회 건물 36.5평, 부속 건물 12평 등을 약 3백만원을 들여 완공했다.

1967년 11월 12일, 1945년도에 졸업한 27회 졸업생들이 기증한 종소리가 지령리에 47년 만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봉헌식을 드렸다. 이렇게 봉헌식을 마친 다음에도 이화여고에서는 계속 매봉교회를 도왔다. 70년도 초반 자립할 때까지 매월 8천원씩의 생활비를 보조했으며, 사례비가 중단된 다음에도 도서비를 수년 동안 부쳤다. 

1980년 후반에 들어와 감리교단은 감리교사학회의 권유로 각 연회마다 유적지에 모여 3‧1절 기념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남부 연회는 유관순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매봉교회당 앞뜰에서 1987년부터 시작하여 매회 마다 4,50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1967년 이래 이화여고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당이 한 30년이 지나 비가 새고 일부분이 썩어 퇴락한 것을 보고, 1995년 12월 19일 연회 실행위원회에서는 매봉교회 건축예산 부담금 1억원을 ‘연회 부담금 비율에 따라 개 교회에 적절히 배분하기로’ 결의했다.

1995년, 3‧1절 행사의 목표를 매봉교회 건축에 두고 1996년은 ‘유관순 기념교회 건축을 위한 해’로 삼았다. 그리고 착공 된지 10개월만인 1998년 9월 14일 드디어 전 연회원의 관심 속에 봉헌식을 드렸다.

매봉교회와 박윤억 목사.
매봉교회와 박윤억 목사.

역사를 뛰어넘는 내일의 주인공을 위해

‘매봉교회가 낳은 민족의 보배 유관순’이라는 책을 쓴 홍석창 목사는 매봉교회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감리교단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했다. 교회에서 뿌리내린 애국심이 죽음도 불사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운동으로 구현되기까지 많은 선교사와 목회자, 지도자들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홍 목사는 유관순 열사의 현대적 의미로 “현대 시대는 그때와 다르지만 청년들이 애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희박하다”며 “오늘날의 애국운동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깨닫고, 매진하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현재 매봉교회는 박윤억 목사가 2000년부터 목회사역 중이다. 박 목사는 특별히 교회학교 어린들에게 원어민 교사를 통해 영어를 가르치는 등 미래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으며, 푸드뱅크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있으며, 지역이 복음화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교회를 방문한 다음세대에도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유관순 열사를 뛰어넘는 인물이 되라”고 말한다. 그는 “특별히 올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는데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아직도 하는 것은 그녀보다 더 뛰어난 애국심과 신앙심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3.1운동 당시가 우리나라의 구약시대였다면 우리는 현재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가 정신 차리고 새 역사를 써야 한다”고 밝혔다.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 생가. 정성경 기자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 생가. 정성경 기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