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②제암교회, 교회 희생 위에 세워진 독립의 역사
[3.1운동 100주년 기념 교회 시리즈]②제암교회, 교회 희생 위에 세워진 독립의 역사
  • 정성경 기자
  • 승인 2019.01.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정신을 간직한 채 내일로 향하는 제암교회, 그 앞에 선 강신범 원로목사(오른쪽)와 최용 담임목사(왼쪽). 정성경 기자
3.1정신을 간직한 채 내일로 향하는 제암교회, 그 앞에 선 강신범 원로목사(오른쪽)와 최용 담임목사(왼쪽). 정성경 기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중심에 섰던 교회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 교회로 1919년 4월 15일 제암리학살사건(이하 제암리사건)의 현장이자 상처 난 지역사회를 보듬고 있는 제암교회(최용 목사)를 찾아갔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에 위치한 제암교회 바로 옆에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이 세워져있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제암교회 성도들

23명 순교자의 무덤이 된 제암교회 초가예배당

'예수 믿다 망한 동네'에서 교회 중 유일한 사적지로

에큐메니칼 운동이자 기억의 장치로써 교회

1919년 4월 15일, 그날의 기억

1919년 3월 1일, 수 천명이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는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 중 한 곳이 발안장터였다. 1919년 3월 31일, 1,000여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4월 1일, 2일 밤에도 주민들은 당제봉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산상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축소되었겠지만, 그 당시 일본 헌병 측 자료에 제암리사건 이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인원 442명에 이른다.

제암리학살사건 이후 스코필드 선교사가 찍은 제암리 상황. 출처 보훈처
제암리학살사건 이후 스코필드 선교사가 찍은 제암리 상황. 출처 독립기념관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들이 제암리에 찾아와 “열다섯 살 위로 남자는 다 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 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집중 사격했다. 불타는 교회에서 뛰쳐나와 목숨을 건지려던 이들은 총에 맞아 순국하고, 남편을 찾아 온 부인들도 순국했다.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지르고,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그리고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이틀 뒤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었다. 또한 일본의 만행 현장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계에 알렸다. 그렇게 그날의 현장이 사람과 사진으로 전해졌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걸린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 정성경 기자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걸린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 정성경 기자

제암교회와 성도들

감리교는 제암리에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故 안종후 권사에 의해 들어왔다. 안 권사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후 1905년 8월 5일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1911년경 초가 예배당을 마련했으며, 1912년에는 인근 해창교회를 흡수할 정도로 발전했다. 제암리사건 당시 교회 설립자인 안 권사를 비롯해 감리교인 12명이 순국했다.

1919년 당시, 제암교회 담임교역자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던 김교철 전도사.

왜 제암교회였을까. 故 전동례 장로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김교철 전도사가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를 자주 전했다고 한다. 당시엔 일본군이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려 따로 설교가 금지된 상황이었다. 다만 성경 본문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 전도사는 일본군이 없는 틈을 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제암교회와 수촌교회 담임 전도사였던 김 전도사는 4월 3일 장안면사무소, 쌍봉산 만세운동, 우정면사무소, 화수리 항쟁 등에 참여했으며 제암리사건이 일어난 4월 15일 체포되어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기 출감했다. 그 뒤 사강, 남양, 오산에서 목회하다 1954년 별세했다.

당시 제암교회 성도였던 故홍원식 권사는 청년시절 대한제국 서울 시위대 제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1914년 3월 29일 고향 제암리로 돌아와 제암교회에서 권사가 되어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홍 권사는 제암교회의 안종후 권사와 고주리의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도 결성해 활동했다. 제암교회는 안종후, 홍원식 권사와 김정헌, 안진순 속장 등이 강력한 지도세력을 구축하며 교회 외에 강습소를 설립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까지 실시했다. 홍 권사는 제암리사건 당시 순국했으며 부인 김씨도 같은날 순국했다.

제암리학살사건으로 불타버린 예배터 위에 세워진 3.1운동순국기념탑 뒤로 휘날리는 태극기. 그 사이에 보이는 제암교회 십자가 탑. 정성경 기자
제암리학살사건으로 불타버린 예배터 위에 세워진 3.1운동순국기념탑 뒤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그 사이에 보이는 제암교회 십자가 탑. 정성경 기자

매일 오후 2시에 드려지던 전동례 권사의 기도

제암리사건 이후 교회가 소실되고 1965년 일본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일본속죄 위원들의 속죄헌금으로 네 번째 교회도 준공했었다.

1980년 3월 25일, 강신범 원로목사가 제암교회에 왔을 당시 61년이 흘렀지만 지역에서는 제암리를 “예수 믿다 망한 동네, 망한 집”이라고 불렀다. 강 원로 목사가 31번째 목회자였다. 당시 제암교회에는 전동례 장로를 비롯한 6명의 노인들이 앉아있었다.

제암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 권사는 매일 오후 2시 교회에서 기도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스코필드 선교사가 공동묘지에 수습한 유해도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강 원로목사는 당시 문화재관리국을 찾아가 제암리사건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1982년 9월 21일 23위 유해발굴을 마치고 제암교회 뒷동산에 합동 장례식을 치뤘다. 1982년 12월 21일에는 교회일대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사적 제299호로 지정됐다. 한국교회 중 유일한 사적지다. 1983년에는 사건 현장이었던 옛 초가예배당 터에 3.1운동 순국기념탑을 건립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전 권사는 1992년 11월 8일 소천했다.

그날을 간직한 채 내일로 향하는 제암교회

그러면, 오늘날 제암교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치만 교수(장신대, 한국교회사)는 “제암리 사건은 그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 교회를 탄압하는 일제의 이미지가 확고해지는 사건이었다”며 “교회에 사람들을 가두고 불태웠다는 것에 기독교 국가들에 공분을 사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이로 인해 미국의회 안에 ‘조선독립청원안’도 발의됐었다. 이 교수는 “제암교회 사건 자체가 아니라 독립운동 전체가 에큐메니컬 운동이었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며 “천도교와 함께 종교 간의 대화가 있었다는 것에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는 “성경에 보면 요단강을 건넌 후 쌓은 돌무더기처럼 기억의 장치가 많이 나온다”며 “제암리가 학살의 현장이면서 교회라는 것이 교회사 속에 아픈 기억이지만 믿음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가치와,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순교로 이어지게 된 기억의 장치로서 중요한 의미”라고 했다. 또한 “3.1정신을 상기시킬 수 있는 장소로써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매년 10만 명이 제암교회가 포함된 화성 제암리3.1운동 순국기념관을 찾는다. 그 중 기독교인이 6만 여명이고, 일본인 기독교인들도 많다. 이곳에는 23인 순국묘지와 23인 상징 조각물, 3.1정신교육관, 3.1운동 순국기념탑, 스코필드 박사 동상이 있다.

그래서 현재 제암교회는 이원화된 목회사역을 하고 있다. 제암리사건 관련 논문을 쓴 강 원로목사가 외부사역을, 100여 명의 성도들을 돌보는 내부적인 목회사역은 최용 담임목사가 담당한다.

올해 제암교회의 표어는 ‘새로운 희년을 선포하라(레25:10~12)’이다. 최 목사는 “3.1정신이라는 것이 그 당시 1% 기독교인이 정신적인 버팀목이자 지주가 되었던 것”이라며 “현재 20%가 넘는 기독교인과 수많은 교회들이 이 곳을 방문함으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도전 받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2001년에 지어진 제암교회 예배당 내부. 제암리학살사건을 국가적으로 상기시켜 오늘까지 이르게 한 강신범 원로목사가 앉아있다. 정성경 기자
2001년에 지어진 제암교회 예배당 내부. 제암리학살사건을 국가적으로 상기시켜 오늘까지 이르게 한 강신범 원로목사가 앉아있다. 정성경 기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