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좋은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목회에 지장이 없을 것 같은 ‘객원기자’란다. 평소 언론에 대한 아쉬움을 한 켠에 갖고 살던 나였기에 해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언론과는 아주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다. 1년 동안 지역신문에 신부님, 스님과 돌아가며 종교 칼럼을 기고(起稿)하기도 하였고, 또 현재 타언론사에 매주 한 번 5분 칼럼이라는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매스컴이라는 도구를 통해 끊임없이 ‘세상과 대화’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다. 기자가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른 언론은 ‘세상의 등대’요, ‘대중의 지팡이’가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지난 번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가 있었을 때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들 중에 80만 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사회복지 기관의 80%가 기독교인이 운영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심지어 가톨릭이 운영하고 있는 어느 복지시설의 후원자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는 통계도 있다. 국가가 모금하는 성금(誠金)도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인의 참여도가 절대 다수라는 통계도 있다. 이런 데도 기독교인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말씀만 고수하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감추는 우(愚)’(마5:15)를 범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또 하나 더 있다. 기독교의 자정능력도 중요하고, 개혁도 필요하지만 적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하는데, 어쩌면 바벨론 사신에게 내탕고를 몽땅 보여준 어리석은 히스기야 왕(왕상20장)처럼, 물고 뜯는 기독교인들의 치부를 여과 없이 공론화하는 작금의 기독언론들 앞에 기독교의 어둠이 아니라 빛을, 악행이 아니라 선행을, 문제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실을 은폐할 마음은 없다. 의사의 메스처럼 치료를 위한 칼을 대고 싶을 뿐이다.
문학의 목적을 ‘구원’이라 말한다. 물론 그 구원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자주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 인간의 속살을 보며 울기도 하고, 인간의 고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언론이 가야할 길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의 본질, 교회의 역할, 성도의 정체성을 일깨워서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을 수 있다면,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언론의 역할일 것이다. 사람이 잠시 어둠에 머물렀다 하여도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가듯 교회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팡이 역할을 해 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 일에 촛불 하나 밝힐 수 있다면 더욱 감사할 뿐이다.
빛은 밝음도 있고, 따뜻함도 있고, 치료하는 능력도 있고, 검은 속을 드러내는 철저함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딱딱한 표피를 뚫고 새싹을 틔워내게 하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힘이다. 이 따뜻한 기운을 교회와 특별히 내가 속한 예장 통합과 중부지역 교회들에게 나의 작은 힘을 불어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다.
때릴 때도 있고, 감쌀 때도 있고, 도려낼 때도 있고, 약을 먹여 기운을 북돋을 때도 있듯이, 한국교회가 소수 종교로 전락할 조짐이 보이는 위기의 때, 서로 비방하고, 헐뜯고, 문제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힘을 북돋고, 부축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을 뿐이다. 어둠 속에 따뜻한 빛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