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는 평화의 능력을 상실했는가?
왜 교회는 평화의 능력을 상실했는가?
  • 박원호 총장
  • 승인 2018.12.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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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구원이나 교회의 구원에 매달리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이루는 넓은 의미의 평화로 돌아가야 한다."

평화라는 말이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남북의 평화, 미북의 평화, 국내적인 평화, 계층간의 평화... 갑자기 이 땅이 평화의 나라라도 된 듯 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평화라는 말 때문에 더 혼란스럽다. 각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평화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매년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평화를 외치는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소망도 기대도 관심도 되지 못한다. 왜 교회는 평화의 능력을 상실했는가? 평화(샬롬)는 기독교의 근본이며 사명이지 않는가? 세상의 창조도 평화 가운데 이뤄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땅에서의 평화를 선포함으로 시작했으며 교회의 사명 또한 평화 아닌가? 교회가 지금이라도 평화에 대한 일관성 있는 태도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거짓 평화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로마의 평화가 시작될 때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회는 거짓된 평화를 이기고 참된 평화를 이루어야할 사명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무력에 의한 정복과 탐욕과 자기만의 평화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평화이며, 모든 생명을 품는 보편적 평화다. 여기엔 당연히 의와 기쁨이 동반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나님, 인간, 자연, 내가 몸처럼 연결되어 있는 관계적 평화이다. 네 구성원들은 서로의 고유함을 보존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됨의 관계이다. 한 몸같이 연결되어 있기에 한 지체가 어려움을 겪으면 전체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하나님과의 평화가 출발점이며 근본이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근대 사회의 목표는 하나님을 몰아내는 것이며 의미를 버리고 힘을 갖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근본 문제는 지난 몇 백년 동안 근대화의 폭력에 의해 하나님을 몰아낸 결과이다. 모든 사회가 오로지 힘을 향하여 절제없이 달렸으며 경제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힘의 한계를 무한하게 팽창시켰을 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미친 전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교육 또한 힘을 추구하기 위한 시종이며 도구일 뿐이다. “아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하는 것도, 지혜를 위한 것도, 홍익도 아니라 오직 힘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생명의 터전이요 동반자가 아니라 철저한 이용 대상이요 내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변했으며 이웃과의 관계도 나와 당신(I and You)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I and It)의 야만적 투쟁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지구 곳곳에 평화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왜곡으로 인해 다른 모든 관계들도 일그러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은 그 어느 곳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이다. 전 국민의 5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땅과 사회는 평화로 넘쳐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세상이 등을 돌리고 비난하고 심지어 염려까지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는 평화의 능력을 상실했는가? 주님의 말씀이 그 핵심을 지적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느니라!” 탐심이 동반된 신앙은 일반 탐심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면서 세상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마치 바알 신앙이 구약의 유일신 신앙과 합쳐지자 후자가 전자에 삼켜 버린 형국과 같다. 바알과 접목된 유대교는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처럼 성전이 거대해지고 엄청난 제물이 바쳐졌지만 삶의 거룩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처럼 성전 속에서도 온갖 세속적인 가치들이 넘쳐나면서 예배는 인간의 쾌락을 위한 잔치가 되었다. 사회에서는 하수같이 흘러야할 하나님의 정의는 온데 간데 없어지면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도 나타났다고 아모스는 경고했다. 다시 그리스도의 평화로 돌아가야 한다. 나 자신의 구원이나 교회의 구원에 매달리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이루는 넓은 의미의 평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박원호 총장

실천 신학 대학원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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