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사역자 장종택 목사에게 듣는 본질로 씨름하기 1부
찬양사역자 장종택 목사에게 듣는 본질로 씨름하기 1부
  • 황교진 객원기자
  • 승인 2018.02.20 11: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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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다' '다윗처럼'의 작곡자 · 《온유야, 아빠야》 저자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뛰며 노래하게 하는 예배사역자의 고백

 

건축에서 콘텐츠로 집중해야 할 한국 교회

1세대 한국 교회 리더들은 추운 밤과 새벽에 산 속의 나무를 붙잡고 기도한 경험들을 지니고 있다. 그 기도의 열정으로 수많은 예배당과 수양관이 아름답게 건축되었고, 우리는 편하고 화려한 예배 장소와 수련회 공간에서 말씀을 배우고 자라왔다. 윗세대의 헌신적인 기도와 땀으로 일궈진 한국 교회의 하드웨어는 도시화의 가속도와 함께 부흥의 전기(前期)를 이루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새 노래로 찬양하며 십대들의 문학의 밤 등 교회 밖보다 감동적인 콘텐츠의 시기를 맞이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감동과 기쁨이 있는 교회 콘텐츠의 힘을 경험하고 자라가는 세대가 줄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지금, 찬양에 울며 손을 든 감동의 시기를 보낸 리더들은 교회 외형의 집중에서 교회 콘텐츠의 집중으로 방향을 잡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에 찬양의 부흥과 재점화를 꿈꾸며 열악한 음반 시장에서 사명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역자들의 고백과 소망을 들어본다. 아울러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 콘텐츠의 가치를 조명해 보기로 하자.

장종택 목사는 <은혜로다> <다윗처럼>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 등 한국 교회가 널리 부르는 곡을 만든 싱어송라이터이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자, 온유야, 아빠야의 저자이다. 국내외 많은 교회가 장 목사를 초청하기를 원해 그의 스케줄은 집회 일정으로 쉴 틈 없이 빡빡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노래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 찬양사역자의 꿈을 꾸셨나요?

1991년 군 복무 중에 만난 군종병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안성진 형제였습니다. 그와 교제하며 작곡과 예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후 저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전공이 건축공학이라 악보 쓰는 법을 몰랐습니다. 작곡 전공인 친구 배호환 형제(현 목사)의 도움으로 악보를 만들어 녹음했습니다. 제게 떠오른 곡이 악보로 만들어지는 신기함에 온통 노래 만드는 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1993년 대학 2학년 때 고신대학교 창작복음성가경연대회에서 제 곡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인생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건축의 길이냐?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CCM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가서 음악을 배우는 길을 택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라셨나요?

저는 4대째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첫째, 주일성수입니다. 오랫동안 자영업을 해오셨는데 주일에는 단 한 번도 가게 문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에 대한 타협 없는 고집을 배웠습니다. 둘째, 성경 묵상입니다. 매일 성경 말씀을 읽으시며 제게 말씀을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지금까지 말씀에 위배되지 않도록 철저히 묵상의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영향력은 사역자로서 돈에 대한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돈을 밝혀 돈에 굴욕당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유혹되면 결국 영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삯군 목자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요즘도 전화를 말씀하며 상기시켜 주십니다. 반면, 하나님 뜻이라 거론하면서 정작 자신의 오래된 생각과 판단을 반영하는 인간적 고집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제게 신앙적 고집에 대한 반면교사로 영향을 주신 부분도 있습니다.

 

댈러스에서 찬양 공부를 한 유학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평생을 기독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하고 CCM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공부해 보기로 했습니다. "꿈은 꿈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움직이는 도전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해 온 바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댈러스(Dallas, TX)에 위치한 예배학교 CFNI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생활은 몹시 어려웠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했기에 수업 마치면 바로 일하러 가고, 마치면 피곤해서 학교 과제도 제대로 못 해가고, 미국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어 영어도 늘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영혼은 피폐해지고 소망은 점점 사그라졌습니다. 가끔씩 받아 듣는 한국 지인들의 새로운 앨범을 접하며 "나는 무얼 하고 있나?"라는 자괴감에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욕심을 내어 미국 뮤지션들과 앨범 작업을 했습니다. 후원자도 발굴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앨범을 만들었지만 교회 멤버들과 지인들 외에는 판매할 통로가 없어 결국 아파트 창고만 채우는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제 욕심과 조급함으로 하나님의 뜻인 양 밀어붙인 앨범 작업은 큰 상처와 패배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 위기의 시간에 어떤 묵상을 하며 견뎌왔나요?

앨범을 만들고 나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할 기회들(재정, 초청 사역, 인지도 등)이 생길 거라 확신했는데 오히려 그 작업으로 제 안의 작은 불씨 같은 소망마저 사라졌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살던 아파트에서도 나와 머물 곳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직장도 잃었습니다. 6개월 정도 친동생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갇힌 저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동서남북 모든 상황의 문들이 막혔고 더 내려갈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매일 절망의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삶을 살다보니 그제야 제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 온 목적부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교묘하게 포장된 제 거짓의 가면을 벗기셨습니다.

 

사실 저는 건축공학 전공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같은 과 동기들은 건축사 시험에 합격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중에도 저는 주변인처럼 살았습니다. 아주 소수의 친구 외에 학우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술자리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전공에 대한 공부보다 기독 동아리 CCC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그저 한 학기, 한 학기를 낙제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부족한 전공 지식으로 동기들과 대화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다 CCM 사역자로 사는 친구와 선배들의 교제 속에서 해결책을 나름대로 계산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기에는 기독교 음악인 CCM이 부흥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전문적 CCM 사역자는 아주 소수였습니다. 당시 앨범이 나오면 희소성 가치로 저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입을 했고 사역 초청도 활발하게 주어졌습니다. 기독교 음악 사역자로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도 발매하고, 초청도 받아 사례비와 앨범 판매로 돈도 벌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익숙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지낼 수 있다는 내면의 계산이 있었고 바로 그것이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한 동기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정직하지 못했고, 하나님에게도 정직하지 못하다가 죽음 앞에 서면서 정직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울며 주님 앞에서 떨며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깊은 두려움 속에서 밤새 예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삼상 2장 35절 말씀으로 저를 새롭게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한 충실한 제사장, 하나님 마음과 뜻대로 사역하는 예배자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백사장 모래알 중 하나였던 존재감 없는 제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집회를 하는 이 예배사역자의 삶으로 오기까지 그야말로 주님의 긍휼과 은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제게 <내 삶 속에 주님 없었다면> 등 귀한 노래들을 주셨습니다.

 

귀국해서 정착하기까지 어려웠던 점, 감사했던 점은?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지인들의 초청으로 집회를 가졌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인식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약 7개월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3년 만에 갖게 된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주권 포기는, 혹시라도 한국에서의 삶과 사역이 힘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상구가 될까봐 퇴로를 차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득권을 버리고 온 저에게 하나님은 많은 일을 맡기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무명한 저를 초청해 주는 곳은 없었고 생존조차 힘들 만큼 수입이 전무했습니다. 몇 년 동안 피자 배달과 영어 과외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곰팡이 가득한 집에서 먹을 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름에는 더위에 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지내게 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와중에 사역의 소중함을 알고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는 영적인 훈련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주일 사역이 들어오면 자원하여 1박 2일로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예배 세미나, 주일 찬양 집회로 섬겼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예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주일 집회 1시간 정도 하는 것이 편하지만, 한번 주어진 사역의 기회를 주님의 의도대로 흐르게 하기 위해 사역의 본질에 최선을 다하는 몸부림이 필요했습니다. 1박2일 섬긴다고 사례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말 예배 세미나를 통해 우리를 말씀의 거울 앞에 세워 자신을 돌아보게 했고 저를 초청한 분들과 같이 식사하고 운동도 하면서 가족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신뢰가 쌓이니 다음 날 집회에 임하는 성도님들의 예배 집중과 몰입은 빠르고 깊어졌습니다. 띄엄띄엄 들어오는 사역은 제 안의 갈망에 불을 붙여 주었고, 주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시간에 진정성을 가지고 준비하는 습관이 길러졌습니다.

 

《온유야, 아빠야》(예수전도단 간) 표지
《온유야, 아빠야》(예수전도단 간) 표지

장종택 목사는 고통의 시기에 노래를 받은 찬양 사역자이다. 6장의 앨범에는 고통 중에 만난 하나님, 기가 막힌 상황에서 건져 주시는 은혜의 가사가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책 온유야, 아빠야로 소개한 어린 딸 온유의 아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온유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혼수상태가 되어 61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부활절 주일을 앞둔 주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죽음과 싸우는 온유를 위해 전 세계의 많은 교회와 성도가 기도했다. 장 목사는 SNS로 매일 정직한 기도를 부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여 치유를 얻었다. 사랑하는 딸을 통한 부활의 은혜와 한국 교회에 대한 소망을 2부에 이어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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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2018-03-29 18:15:44
늘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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