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울며 씨를 뿌린다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울며 씨를 뿌린다
  • 김찬주 지역기자
  • 승인 2018.12.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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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교회 김민철 목사

개척교회 분투기 2.

김민철 목사는 말씀과 기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신앙, 정통 교회를 추구한다. 여러 다양한 형태의 실험적인 교회의 모습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요즘, 말씀과 기도와 교회 중심의 전통적인 모습을 주장하는 것은 일견 구식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6년간 정착한 등록 교인이 한 명 없어도 김 목사는 꿋꿋하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한 길 가는김민철 목사.(사진제공)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한 길 가는김민철 목사.(사진제공)

그는 모태신앙이었다. 고2때까지 교회는 으레 가야하는 건 줄 알았고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중고등부 학생회장까지 했다. 당시 김 목사는 공부를 제법 잘해서 비평준화 지역으로 유학(?)을 왔는데, 그곳은 입시 경쟁이 치열했다. 당연히 그 학교는 대학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 공부에 신경을 많이 썼다. 고3이라도 학생회장이라 교회 수련회에 빠질 수가 없어서 야간자율학습을 빠지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허락을 안 해 주셨다. 생각 끝에 당일에 선생님께 편지를 써놓고 무단으로 학교를 나와 수련회에 참석했다, 2박3일간 다녀온 수련회에서 김 목사는 은혜를 많이 받았고 ‘주의 길을 가야겠다’ 결심했다고 한다. 자율학습을 빠졌어도 수련회 이후에 오히려 성적이 더 오르고 수능모의고사 성적도 같이 올랐다. 당시는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 무조건 신학대에 가서 목사가 되어야 하는 줄로 생각하고 신학대 진학을 하려고 했더니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다. 가정 형편도 어려웠고 장손에 대한 기대도 크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신학은 대학원 가서도 할 수 있으니 학부는 아버지의 원대로 일반대학에 진학을 했다. 신대원을 가기 위해 영문학 전공을 선택했지만 영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신학을 하겠다는 꿈을 접었다. 무릎 때문에 병역도 면제 받고 공부할 조건은 되었는데 꿈이 사라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대학에서는 해 주는 것도 없고 삶의 좌표를 잃은 청년 김 목사는 교회도 안 나가고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마침 동생도 대학 진학 시기가 되어 대학생 둘을 뒷바라지 할 형편이 못 되니까 휴학을 했다. 친구와 어울려 술도 마셨다. 97년 IMF 사태 이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학 신입생에게도 카드가 발급되던 시절이었다. 98학번 신입생이었던 김 목사도 카드를 발급받았다. 철없던 시절, 카드빚 무서운 줄 모르고 빚도 많이 졌다. 다 술값이었다.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3개까지 했다. 그래도 빚을 갚기가 어려웠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려는데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벌이가 좋을 거란 생각에 일면식도 없는 클럽을 찾아갔다. 고된 일이 많았지만 성실하게 근무했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다. 빚도 갚고 학교 선배들의 권유로 자퇴했던 학교도 재입학해서 어렵사리 졸업을 했다. 나이트클럽 일로 생활비며 학비도 마련했다. 한 달 7, 8 백씩 벌만큼 수입도 좋았지만 성실하게 사시는 부모님 뵙기도 그렇고 앞으로 결혼하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떳떳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2005년이었다.

학연을 이용해 영업하며 클럽에서는 인정도 받았다. 철저히 돈과 힘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클럽을 나와 막상 취직을 하려니 준비된 게 없었다. 흔한 토익 성적 하나 없는 상황에 어디 이력서를 낼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외삼촌이 시무하는 교회에 국회의원 보좌관이 출석하고 있으니 가보라고, 취직을 시켜줄 지도 모른다고 연락을 하셨다. 일주일이나 미적대다가 어머니 부탁이니 한 번 가보자고 7년 반 만에 교회를 갔다. 막상 교회에 가니 너무 어색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싫어 예배만 마치면 그냥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외삼촌이 설교를 하실 때 아무 것도 들리지를 않았지만 오직 ‘눈동자’라는 단어만 귀에 들어왔다. 그 눈동자가 그동안 한순간도 빠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너무 무서웠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심을 하게 됐다. 내친 김에 저녁 예배까지 드리려고 기다렸다. 저녁 예배를 위해 성경이 필요했는데 비치된 성경책 중에 새 것도 있었는데 한 옆에 놓인 낡은 성경책에 마음이 끌렸다. 새 책을 치우고 그것을 집어 펼치니 고3때 한참 은혜 받아 메모까지 해가며 열심히 읽었던 김 목사 자신의 책이었다.

고3, 은혜 받아 꼼꼼이도 메모했던 성경책이 회심한 김 목사를 반겨줬다.
고3, 은혜 받아 꼼꼼이도 메모했던 성경책이 회심한 김 목사를 반겨줬다.(사진제공)

국회의원 보좌관은 어디로 가버리고 회심한 김 목사만 남았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니 가까이 살던 외숙모의 조카인 사돈 누나와 돈을 합에 10만원을 만들어 동대문에서 옷을 가져다가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던 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 이번에는 다른 내용은 안 들리고 ‘서원’이라는 말만 귀에 와서 박혔다. 또 외삼촌이 사사 입다에 관한 설교를 하실 때도 잘못된 서원 내용은 안 들리고 ‘서원’이라는 단어만 들렸다. 외삼촌과 상담을 했다. 외삼촌은 ‘목회는 너무 어려우니 좋은 장로가 되어라’ 고 권면하셨고, 김 목사 자신도 그 말씀을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47일간 저녁 금식하며 새벽기도를 드리는 작정 기도를 했다. 그 기간에 마침 외삼촌의 요나서 설교를 들으며 목회를 해야겠다 결정을 했다. 마음이 그냥 행복해졌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인정을 하시고 돕겠다고 격려를 해주셨다. 2006년 7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2007년에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오랜 시간 교회 밖에 있다 보니 교회 사람들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분들을 보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개인 중심적인 신앙생활, 예수 믿으면 복 받아야 한다는 기복주의 등. 또 주변에 이단에 빠진 이들이 있어 공부하게 되면서 오히려 교회 안의 문제를 더 보게 되었다. 이때 말씀과 기도와 교회당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중심이 섰다.

2008년 1월, 양 무릎 수술을 하느라 휴학을 한 기간 동안 소예언서를 읽으면서 신학적 회심을 하게 됐다. 개교회주의, 개인주의, 내가 잘 돼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깨지고 역사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눈이 떠졌다. 이때부터 정치, 경제, 사회를 공부했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됐다. 에스라하우스의 성경강좌를 통해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 멤버들과 함께 신대원을 졸업하자마자 교회를 개척했다. 전라도 고흥에 귀농기독교공동체를 꾸미려고 열 가정이 모였다. 그 중에 목회자 가정이 셋이었다. 김 목사가 1호로 내려가 교회를 개척하며 기반을 잡기로 했다. 마을에 수퍼마켓도 없는 시골이었는데 거기 집을 마련하고 공동 구매 공동 운영하는 교회당으로 쓸 건물도 구입했다. 김 목사는 모든 일에 식구처럼 지내며 품앗이와 잔치로 공동체를 이뤄가는 시골 문화에 잘 적응하고 동네 인심도 얻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방회에 교회 개척 설립을 신청했는데, 허가가 나지 않은 것이다. 교단 상황이라면 당연히 허가를 내 줘야 하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김 목사는 당시 전도사였기에 안수를 받기 위한 절차를 진행해야 해서 교단에 남을지, 교단을 떠날지 고민했고, 교단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와도 의견이 달라 결국은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결국 공동체를 통해 어떤 유익도 취하지 않겠다는 규약대로 집과 밭을 처음 산 가격대로 되팔고 고흥을 떠났다.

고흥을 떠나기로 했을 때 경기도 이천에 보증금 3천에 내놓은 교회 건물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교인들은 없고 건물만 3천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살 집도 마련해야 했기에 금액의 반은 헌금하고, 반은 공식적인 교회의 빚으로 남긴 채 교단 재단에 편입을 시켰다. 임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가 건물 지하였다.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간절함이 묻어나는 김민철 목사의 강대상(사진제공)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간절함이 묻어나는 김민철 목사의 강대상(사진제공)

2012년 10 월 첫 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전부터 그 교회에 다니던 아이들 여섯 명이 왔다. 이 아이들은 근처의 규모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간식을 받은 후 또 김 목사 교회에 간식을 받으러 왔다. 막 입주해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3주 연속 빵과 우유만 주니 다시 오지 않았다. 교인이 단 한 명이라도 행복한 목회를 하고 싶다는 신학교 시절의 꿈이 있었지만 교인은 가족밖에 없는 목회를 시작하니 당장 생계가 막연했다. 마침 기회가 생겨 실천신학대학원의 간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역과 함께하는 선교적 교회를 위해 주민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이 교회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에게 이미지가 실추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주민은 지역을 위해 우리교회가 어떤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느냐는 설문에 ‘아무것도 하지 마라’, ‘교회 간판이나 바꿔 달아라. 그 이름 계속 가지고 여기서 교회 못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했다. 고심 끝에 교회 이름을 ‘한솔교회’라 바꾸고 지금까지 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도 교인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2013년 7월부터 2014년 7월까지 꼭 1년 기간 동안 한 가정이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 가정은 직장 이전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교회와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이후에는 간간이 혼자 왔다가 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 정착한 성도가 없다. 그래도 김 목사는 아내와 아이들 또한 목회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아내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 김 목사 자신은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기쁨, 충의, 온유 세 어린 자녀들과 함께 종량제 봉투 전도지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대하는 설레는 순간이다.(사진제공)
아내와 기쁨, 충의, 온유 세 어린 자녀들과 함께 종량제 봉투 전도지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대하는 설레는 순간이다.(사진제공)

 

전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할 뿐이다. (사진제공)
전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할 뿐이다. (사진제공)

부임하고 2년 동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교회 이미지가 나쁘기도 했고, 교인들도 없었을 뿐더러 아내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동기들을 만나 보니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전도지에 붙여서 전도한다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것은 할 수 있겠다 싶어 아내와 함께 종량제 봉투 전도를 시작했다. 이 전도지를 보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교인이 너무 없는 상황은 교회 정착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과 친해져서 병이 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가서 기도도 해주고 물질적인 도움도 주면서 가깝게 지내지만 그렇게 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석 달이나 같이 예배를 드리던 사람도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떠나갔다. 부임한 지 6년이 넘었는데 왔다 간 사람이 열 명이 안 된다. 지난주에도 한 사람이 왔었지만 다시 오지 않았고 가족끼리만 예배를 드린 것이 6년 동안 200주는 넘는 것 같다.

수지선한목자교회에서 오셔어 지역어르신들을 섬겨주셨다.(사진제공)
수지선한목자교회에서 오셔서 지역어르신들을 섬겨주셨다.(사진제공)
종량제 봉투 전도지 만들기도 도와주고 가신 수지선한목자교회 교인들. 교회 간 이런 도움과 연대가 큰 힘이 된다. (사진제공)
종량제 봉투 전도지 만들기도 도와주고 가신 수지선한목자교회 교인들.
교회 간 이런 도움과 연대가 큰 힘이 된다. (사진제공)

그간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자립교회로 제법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교회에서 청빙이 있었다. 그런데 담임목사로 오는 조건으로 전임목사의 전별금 4천을 요구했다. 아무리 관행이라고는 해도 빚을 내서 헌금을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교회에 헌금을 한다고 해도 목사 자리를 사고파는 것 같아서 신앙 양심이 허락을 안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지켜보고 계시는데 당당하지 못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신학적 회심 이후 분명하게 믿는 것은 하나님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끝까지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아이들의 아이들 세대에서라도 열매를 거둘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오늘도 눈물로 씨를 뿌린다. 옳으면 뿌려야 하는 것이 맞다. 한솔교회 교인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역 주민들인 타 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하는 성경공부가 일 년이 넘었다. 또 올 1년 동안은 어느 교회의 노인 대학에서 교리강의를 했다. 내년에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이런 모임들을 통해 큰 힘을 얻는다. 물론 앞으로 사정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그런 상황이 위협으로 다가오거나 실패와 절망과 낙심으로 오지도 않는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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