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에서 김윤식 배우가 연기한 박 처장은 북한에서 넘어온 실향민이다. 박 처장은 걸쭉한 이북 사투리를 사용하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폭압적으로 취조한다. 그가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화를 갈망하는 인물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이유는 북한에서 그의 가족이 소위 ‘빨갱이’에게 몰살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 처장은 자신이 남한에서 민주화 운동 주도자를 검거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애국 행위이며, 가족을 위한 원수 갚음이라 생각한다. 영화 내에서 박 처장은 자기가 하는 일이 추호도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설령 고문으로 사람이 죽더라도 말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빛나는 제자도의 다이아몬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아름다우면서도 단단하다. 그렇지만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제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다.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이 가장 순종하기 어려운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원수사랑’ 일 것이다. 나에게 사랑을 준 친구가 아니라, 나에게 아픔을 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렵다.

그런데 북한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한다면, 남한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 원수(元帥)는 주로 국가의 최고 지도자나 김일성 주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양에서 발간된 사전인 『조선 문화어 사전』에 따르면 원수는 가장 높은 군사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으신 분을 의미한다. 실제로 남한 사람이 생각하는 원수(怨讐)는 북한에서 원수가 아니라, ‘원쑤’다.

북한에서 출판된 책인 『우리말 어휘 및 표현』에서는 원쑤라는 단어를 실제로 이렇게 활용한다. “난관을 맞받아 나아가라.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겠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지금도 북한에서는 국가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원수’나 대적을 가리키는 ‘원쑤’라는 단어를 실생활에서 많이 쓰기 때문에 두 단어를 다르게 발음하는 것이 중요하다. 드물지만 북한에서는 어린 아이가 ‘원수’라고 발음해야 하는 상황에서 ‘원쑤’라고 발음 해서 어른들에게 크게 혼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맞이해서 남한과 북한의 교류가 다방면으로 재개되고 있다. 이런 남북한 교류가 올림픽 이후에 동북아시아 평화로 이어질지, 일회성 만남으로 끝나버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순간이야말로 “너의 원쑤들을 사랑하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에게 너무 중요하다. 남한의 그리스도인이 그동안 산상수훈을 열심히 공부하였던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닐지 누가 알겠는가?

황재혁 객원기자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