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모이는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를 주재한 우르바노 2세는 11월 27일 되는 날에 공의회 연설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그 당시 우르바노 2세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고 전해진다.
“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밖의 도시들에서 그리스도교 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튀르크인들의 진출은 그칠 줄 모르고 이미 일곱차례나 그리스도교 교도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가오고 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하라.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교도들이여.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근동의 그리스도교 교도의 구원에 힘써라.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사함을 받으리라.”
중세 그리스도교는 유럽 사회의 봉건체제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서유럽 사회를 통합시켰다. 십자군 원정은 교회와 봉건제라는 두 개의 핵심조직이 안정적으로 발전하였기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다. 중세의 그리스도인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복합적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전사라는 자기 인식과 교황청 호소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책임감, 라틴왕국에 대한 방어 때문 이었을 것이다.
직업군인과 용병으로 구성된 정규 십자군은 상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1099년 11월에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은 십자군이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과였지만, 그 이후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통의 목표를 상실하게 되었다. 흔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충돌로 이야기되는 십자군 전쟁은 이후 수세기 동안 계속 되었고, 어떤 학자들은 현재도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을 중세 십자군의 관점으로 재해석 하려고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