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1월 8일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헤이그에서 사망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불릴 정도로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인생이 평범한 신학자의 인생과 조금 다른 것은 그가 신학자이면서 목회자, 신문발행인, 국회의원, 대학총장, 네덜란드 수상까지 역임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온 만물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의 자유대학을 세우며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이것이 정치가와 사업가, 그리고 과학자들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자유대학은 세속적인 정부와 권위와 세속 학문의 오만함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자유대학은 모든 지혜와 지식이 숨겨진 보고인 하나님 한 분께만 복종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유대학을 세울 뿐 아니라, ‘반혁명당’을 창당하고, ‘반혁명당’의 대표로서 결국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된다. 그가 창당한 ‘반혁명당’은 다름 아닌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기독교는 창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원칙 아래 자유와 권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주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의지에 기반을 둔 인위적인 권위를 만들어냈다. 프랑스혁명은 사회의 유기적 결합을 방해하여 사회관계를 깨뜨림으로써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일차원적인 인간을 양성한다.” 그 당시 아브라함 카이퍼는 프랑스 혁명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거부한 인간의 반란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반혁명당’을 통해 절대주권은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천명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며 네덜란드를 성경적으로 개혁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삶을 통해 한 명의 신학자가 교회를 넘어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