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의 왕이자 보호자’였던 여성 지도자 잔 달브레
‘위그노의 왕이자 보호자’였던 여성 지도자 잔 달브레
  • 권은주 기자
  • 승인 2018.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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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른 여왕 잔 달브레, 제도와 법을 통해 종교개혁 혁신 일으켜
제3차 위그노 전쟁의 행정관, 외교관, 협상가로도 활약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지난 25일 개혁교회 역사와 신학 학술강좌를 진행했다. 그중 16세기 위그노 여성 지도자였던 잔 달브레를 조명하는 강의에 이목이 집중됐다. 발제를 맡은 박경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는 “종교개혁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며 16세기 나라바와 베아른의 여왕으로써 위그노의 지도자요 보호자라 평가받는 잔 달브레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위그노의 왕’이라 불렸던 나바라와 베아른의 여왕 잔 달브레 (출저 : http://www.gogmsite.net)
‘위그노의 왕’이라 불렸던 나바라와 베아른의 여왕 잔 달브레 (출저 : http://www.gogmsite.net)

잔 달브레는 1528년 나바라 왕 앙리 달브레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또한 그녀는 낭트칙령을 발표한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어머니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박 교수는 잔 달브레가 본격적으로 개혁주의 행보를 시작한 시점이 1560년 성탄절에 베풀어진 성만찬에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족의 일원이었던 잔은 성탄절에 베풀어진 성만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프로테스탄트 칼뱅주의자임을 선포했다”며 “이 사건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고, 제네바의 칼뱅에게는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했다.

잔의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헌신은 아버지 앙리 달브레가 죽은 후 나바라와 베아른 지역을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잔이 추진한 종교개혁의 특징에 대해 박 교수는 “개인적인 변화와 회심을 통해 개혁신앙을 확산시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도와 법의 개편을 통해 종교개혁의 뿌리를 내리려 한 점”이라고 평가했다.

잔이 왕위에 오르면서 발표한 것이 바로 7가지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 법령이다. 가톨릭이 우세했던 시대 상황 상 ‘동시주의’를 표방하며 로마 가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의 신앙의 자유도 동시에 보장한다는 내용이 그 골자다. 세부 사항을 보면 △서로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자를 향한 모욕 금지 △미사경본이나 십자가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관습대신 성서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서약으로 대체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제외한 강제적 헌금 금지 △우상숭배를 종용하는 자의 설교 금지 등이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베아른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아니라 개혁 신앙도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것”이라며 “가톨릭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프로테스탄티즘의 승리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베아른의 교회 법령은 이후 몇 차례 개정되면서 계속 발전해 나갔다. 1563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주민이 다수인 곳에서는 대성당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하고 성상과 십자가와 성인의 유물들이 제거됐다. 뿐만 아니라 잔은 성서를 피레네 산지 언어인 바스크 방언으로 번역하도록 했고, 제네바에 목회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1571년에는 7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교회 법령을 통해 나바라와 베아른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전면 금지하고 개혁교회 신앙을 수립함으로써 칼뱅주의가 베아른의 유일한 신앙이 되기에 이르렀다.

잔 달브레의 개혁 신앙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박경수 교수
잔 달브레의 개혁 신앙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박경수 교수

박경수 교수는 잔이 실시한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실시한 종교개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엘리자베스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간의 길을 택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를 제시한 반면, 잔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시주의를 거쳐 종국에는 개혁신앙을 정착시켜 나갔다”고 설명했다.

1568년, 제3차 위그노 전쟁 발발하며 잔의 신앙의 행보는 더욱 빛을 발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잔은 위그노의 도시인 라로셀로 향했다. 그녀는 시동생인 루이 콩데, 위그노 지도자였던 가스파르 콜리니와 연합하여 라로셀의 위그노를 이끌었다. 박 교수는 이 당시 그녀의 활동에 대해 “잔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이론가로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외국 군주들의 원조를 이끌어 내는 외교관으로서, 군대의 행정, 재정, 모금, 관리를 맡은 행정관으로서, 감동적인 연설로 위그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결집시키는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기 위한 협상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잔은 16세기 후반 ‘위그노 여왕’, ‘위그노의 보호자’라는 칭호에 걸맞은 여성 지도자였다”며 “그동안 역사에서 잔이 제3차 위그노 전쟁에서 보인 중추적 역할이나 그녀의 탁월한 정치적, 종교적 활동들이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마르가리타의 문학적 명성과 그녀의 아들 앙리의 정치적 역할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44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불꽃처럼 살았던 한 여성이 남긴 가슴 시린 이야기와 흔적, 유산을 대하면서 오늘을 보다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다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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