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목동실버복지문화센터의 운영기관은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 목동감리교회이다. 복지관은 운영위원회가 있다. 운영위원회의 역할은 재무회계관리, 지역사회와의 네트워크, 사회복지전달체계, 이용자의 상태 등 기관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지 점검, 제안하는 기구이다. 운영위원장은 목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신 최현규 목사님께서 맡고 계시다. 얼마 전 목사님께서는 “우리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지역주민과 함께 했던 것 못지않게, 목동실버가 개관 3년 만에 지역사회에 뿌리를 잘 내렸다. 목동실버가 지역사회와 어떻게 네트워크를 하고, 행정기관과 어떻게 협력을 하는지, 그리고 이용자들과 어떻게 협의하는지 벤치마킹을 해보자”고 당회에서 말씀하셨다. 교인이면서 기관장인 나에게 운영위원장님의 이 말씀은 과분하지만 감사한 칭찬이었다.
사실 사회복지와 교회는 지역주민을 섬기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이 진행되어 온 역사도 다르고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의 개념이 다르다. 사회복지에서 ‘우리’는 전문성과 공간을 지역사회에 공개하는 개방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용자의 종교, 정치적 성향, 개인성향 등을 구분하지 않고 열어놓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복지기관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취지에서 목동실버는 공간을 지역사회에 개방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또한 지역주민의 말을 경청하고, 지역주민이 손을 내밀 때 무조건 잡는다. 그동안 우리 센터는 마을잔치에 참여하여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고, 재래시장에서 호프데이를 하면 모두가 참여하여 시원하게 마시기도 했으며, 지역의 빈 공간을 찾아 아웃리치를 하기도 했다. 찾아오지 않는 초·중·고등학교의 경우는 교문을 먼저 두드려 학생들이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협의했다. 운영위원장님으로부터 받은 과분한 칭찬은 이런 노력 덕분인 것 같다.
반면, 지역교회는 지역주민을 섬기는 데 울타리를 치는 편이다. 우리믿음, 우리교회, 우리주차장, 우리목사님, 우리성도, 우리교단, 우리기독교, 우리형제자매, 우리, 우리, 우리... 우리끼리 ‘우리우리’를 외치는 사이 ‘우리’를 교회라는 ‘우리’ 안에 가두는 꼴이 되었다. 우리는 이 ‘우리’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지내면서 그 우리 안에서 또 다른 ‘우리’를 치고 있었다. 성소수자, 미혼모, 다문화가정,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공개적으로 내치거나, 모르는 척하면서 사회와 교회 사이에 큰 옹벽을 설치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종교를 가르는 옹벽을 견고하고 높게 쌓으면서도 교회는 그 옹벽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쓴다. 지역사회의 골목골목에서 **교회 어깨띠를 두르고 따뜻한 차, 달콤한 사탕, 깨끗한 물티슈, 바삭한 비스켓을 나눠 주는 길거리전도활동에는 열심인 교회들을 많이 있다.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우리’에 갇힌 교회와 지역주민이 만나는 만남이 ‘참,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옹벽 안에 갇힌 손을 창살밖으로 빼내어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랄까. 지역주민은 낯선 손길을 피해 지나갈 뿐인 듯 보인다.
군산 행복한교회 박훈서 목사는 “교인 수와 예배당을 내려놓자 비로소 동네가 보였다”고 고백했다. 교회와 사회복지는 비슷한 듯 닮았다. 닮았다기보다는 똑같다. 예수님의 행적은 사회복지사역이었다. 사회복지가 지역사회에 대부분을 개방하듯, 교회도 인적, 물적자 자원과 마음을 무조건 개방해보자. 동네가 보일 것이다. 교회도 복지관처럼 동네 안에 있기에 가능하다. 예수님은 죽음도 개방했다. 예수님을 닮아보자.
박노숙 관장
목동실버복지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