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원 6명, 총회에 사임서 제출
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원 6명, 총회에 사임서 제출
  • 가스펠투데이
  • 승인 2018.08.08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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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반대에 투표한 재판국원들 "빌라도 법정을 떠난다"
7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진행된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소송 재판에서 이경희 재판국장을 비롯한 15명의 재판국원들은 무기명투표에 8:7로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준바 있다. 재판국원들이 떠난 후의 모습
7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진행된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소송 재판에서 이경희 재판국장을 비롯한 15명의 재판국원들은 무기명투표에 8:7로 명성교회 측의 손을 들어준바 있다. 재판국원들이 떠난 후의 텅빈 재판국 회의실.
이수영 목사
이수영 목사

지난 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이경희 재판국장) 6명의 재판국원들이 사임서를 제출했다.  명성교회 세습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지 하루만이다.

총회 재판국에 사임서를 제출한 이들은 세습반대에 투표한 한재엽 목사, 임채일 목사, 서광종 목사, 조건호 장로, 이의충 장로, 조원회 목사 6인이다.

명성교회 세습 관련 재판일에 앞서 6일, 명성교회 세습철회를 위한 예장연대가 '총회재판국의 공정재판을 위한 마지막 기도회'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과 소강당에서 열었다. 이날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은퇴목사)는 '빌라도가 될 것인가, 그리스도의 종이 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하는 이수영 목사 설교 전문이다.

'빌라도가 될 것인가 그리스도의 종이 될 것인가' (요19:1-16)

최근에 지인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유대인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인데(마16:21, 막8:31, 눅9:22) 사도신경에서는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다 뒤집어씌워서 그의 이름이 이천 년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쁘게 반복적으로 암송되게 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음모를 꾸미고 몰아간 것은 유대인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지만 그 당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그들에게 없었고(요18:31) 유다왕국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었기 때문이며, 실제로 예수님을 살릴 수 있었고(본문 10절) 당연히 살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판결을 한 자는 바로 그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도신경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보다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인류구원의 사역은 이 세상의 권세, 악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세상과의 대결이었고 승리였다. 빌라도는 그 악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세상, 그 세상권력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자였다. 그는 그 당시 지상 최강의 제국이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맞서던 로마제국의 황제를 대리해서 유다 왕국을 지배하며 통치하는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그 권력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선고함으로써 악한 세상권력이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사실 그 세상권력을 이기는 죽음이었고 사람들을 죄와 그 지배와 죽음에서 구해내는 위대하고 영원한 승리였음을 말하는 것이 사도신경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예수님 재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오늘날까지 지구상에서 벌어진 모든 재판 가운데 최고로 흥미 있는 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만유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유일한 심판자이실 그 분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그 땅을 정복한 당대 지상의 최강세력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총독 빌라도 앞에 피고로 서셔서 받으신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재판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재판을 빌라도는 엉터리로 한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가 아니라 거짓과 불의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과의 첫 대면에서 이미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아보았습니다(요18:33-38).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민란이 날지도 몰라(마27:24)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양심의 명령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죄 없는 유대인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을 사형시킬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해둘 필요성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서 대역죄나 반란죄 같이 아주 중한 죄목을 발견하지 않고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그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와 명분을 제공하리라고 여긴 것이 예수님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따라서 유대의 왕은 로마황제가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유대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로마황제의 권한을 찬탈하는 일이며 로마제국에 도전하는 일이 될 것이었기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중죄이고 사형에 처해져 마땅한 죄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말을 하게 하기 위하여 빌라도가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27:11, 막15:2, 눅23:3, 요18:33)였습니다. 빌라도의 교활함을 엿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시기는 하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심으로써(요18:36) 빌라도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법정 밖에 몰려와있던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그렇게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어차피 유월절이 되면 내가 당신들에게 한 사람을 사면하는 전례가 있으니 내가 저 유대인의 왕을 석방하는 것이 어떻겠소?” 했습니다(요18:38-39). 유대인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어 그들의 명분을 세워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죽이고 싶지는 않은 사람을 살리는 실리도 얻을 수 있을 절묘한 타협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그 절충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면 했지 예수는 아니라고 소리 질렀습니다(요18:40).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완강한 입장에 빌라도가 다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그의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본문 1-3절). 로마황제가 머리에 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소서”라는 경례를 받는 것을 흉내 내며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군인들로부터 채찍질과 주먹질을 당하고 머리에 박힌 가시관 때문에 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예수님을 데리고 다시 관정 밖 유대인들 앞으로 나가서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본문 4-5절). 빌라도가 비참해진 예수님의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자기가 그들의 요구를 상당히 들어주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을 눈에 보이게 뒷받침한 행위가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채로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 내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로부터 아랫사람들까지 다함께 예수님을 가리키며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자 유대인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했습니다(본문 6-7절).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큰 두려움을 갖고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께 대뜸 묻기를 “너는 어디로부터냐?”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직접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본문 8-9절). 말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에게 궁금증과 자존심을 자극한 듯합니다. 그는 위압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본문 10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본문 11절).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시 로마황제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속국을 관할하는 총독들에게 내린 통치지침 중 하나는 각 피지배국의 고유한 종교와 그 관행을 존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지침을 잘못 지켜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통치를 잘못했다고 문책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총독은 유대교의 법과 관행을 존중하며 유대교의 지도층과 잘 협력해야 하고 로마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해도 그것은 직책상의 권리와 의무에서 오는 것이니 어찌 할 수 없겠지만,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의 죄는 큰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또 다른 뜻을 찾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총독의 직책과 권리와 훈령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넘겨줄 것이지만 그 권력 또한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권자이시고 모든 민족과 나라의 참 주인이시며 모든 권력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판단과 계산에 따라 예수님을 죄 없다고 믿으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겠지만 그것도 사실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으시는 그 감추어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의 주인이 빌라도이고 피고가 예수님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재판장이시고 빌라도는 역사의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압박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뽑아 들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본문 12절). 이 말에는 빌라도도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유대인들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들이 자기를 로마의 훈령을 어기고 총독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지 모르며, 그렇게 되면 자기의 정치적 생명은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고 반역자를 비호하는 자로 몰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로서는 이제 빨리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가 판결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말하기를 “보라, 너희 왕이로다”(본문 14절) 했습니다. 그러자 여전히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기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했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때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본문 15절).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것입니다(본문 16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케 하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이중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셔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붙였습니다(요19:19-20).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잘라 대답했습니다(요19:21-22). 빌라도가 그렇게 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죄 없고 훌륭한 이로 보는 사람들부터 두고두고 쏟아질 비난도 어느 정도 피해보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가능한 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게 돌리며 자신의 양심의 가책도 완화시켜보려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도 없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단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죽이고자 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마27:18, 막15:10).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그의 권력과 장래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양심의 소리보다 유대인들의 고함소리를 따르고 말았습니다. 비겁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란 듯이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기의 무죄함을 애써 강변했습니다(마27:24).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암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빌라도는 권력과 출세에 집착하며 진리와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비겁하고 위선적이며 냉혹한 인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가 짓밟히고 거짓과 악의와 비겁함과 위선과 권력욕과 출세욕이 승리한 빌라도의 법정, 그것은 오늘날 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이 땅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재판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재판국까지도 빌라도의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총회는 잘못하면 한국교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부끄러운 결의였던 신사참배 결의에 버금가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서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모였습니까? 담임목사직의 세습을 금지한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세습을 감행한 교회 때문 아닙니까? 이 시간 세습금지가 정당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논하지 않겠습니다. 세습은 비난받을 수도 있고 칭찬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우리 총회가 세습을 금지하면서도 미자립교회의 경우는 예외로 하자고 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세습금지 결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많은 논의를 거쳐서 총회가 결의한 사항입니다. 한국교회가 대형교회들의 세습 문제로 사회적 비난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된 일이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교회를 보는 사회의 시선이 따가워질 대로 따가워졌고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인 우리 교단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세간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단 내에서도 찬반논의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마침 우리 교단에 앞서 감리교단이 세습금지를 결정하자 모처럼 한국교회에 대한 세간의 평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리고 교계뿐 아니라 방송과 신문 등 일반 언론의 시선이 온통 우리 교단 총회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쏠렸습니다. 듣기로는 만일 우리 교단이 세습을 인정하는 결정을 할 때에는 온 언론에서 우리 교단을 향해 집중포화를 퍼붓겠다고 기자들이 벼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단이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위기의식을 총대들이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단이 무너지면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이 땅에 교회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구국의 결단이라는 차원에서 총대들이 870:81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세습금지를 결의했던 것입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의 역사적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세간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역시 예장통합교단은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되찾고 겸손하게 사회와 함께 가며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의식 없이 총회의 역사적 결단을 대놓고 비웃으며 “이 지구상에 어디를 다녀 봐도 우리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는 없다.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다. 우리에게 잔소리하지 마라. 우리는 알아서 한다”고 한 목소리로 외치며 “할렐루야, 아멘” 하는 이 끔찍한 집단적 오만과 배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누가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까? 이토록 독선적이고 폐쇄적이며 이기적인 교회는 아름답기는커녕 교회라 불릴 자격조차 없고 모든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극도의 역겨움과 수치심을 안겨줄 뿐임을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총회가 결의했으면 지켜야 하고, 안 지키면 지키도록 총회가 명령하고, 그래도 안 지키면 총회의 권위로 제재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를 가지고 이토록 시간을 끌어야 합니까? 어떤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힘 앞에 눈치 보고 망설이고 타협하려 하거나 그 힘으로 덕을 보고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 아부하고 굴종하려 하는 자들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힘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 돈으로 쌓고 철옹성처럼 다진 권력입니다. 그 돈과 권력을 둘러싸고 끈끈하게 얽힌 이해관계입니다. 이 사슬을 끊지 못해서 어정쩡하게 처신해온 것이 지금 우리 총회의 모습 아닙니까? 문제가 된 교회가 본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질적 공헌을 해온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짓밟는 그 교회를 눈감아주고 넘어가자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어느 대재벌그룹이 돈도 많이 쓰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국이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 재벌에게는 탈세, 밀수, 갑질 등 온갖 범법행위를 눈감아주자고 하면 어느 국민이 용납하겠습니까? 법은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는 것이듯이 총회의 결의에는 모든 교회가 순복해야 합니다.

만의 하나 문제가 된 교회가 “우리가 그 동안 그 어느 교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수많은 일을 하고 엄청나게 공헌을 했는데 세습 하나 못 봐주냐. 정말 섭섭하다”는 불만을 품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거두어들이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교만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10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지나간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또 앞으로의 모든 일도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 목사님 아니면 안 되는데, 누구보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실력 좋은 그의 아들이 이어 받아야 계속해서 잘 될 텐데” 하는 것은 모든 성공을 사람이 이룬 것으로 여기는 교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이며, 그것은 우리 장로교 신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바르게 지도할 의무가 총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 바른 지도를 한 것이 세습금지 결의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보란 듯이 총회의 결의에 순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왜 총회는 그 교회에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돈 때문이고, 돈으로 다져진 권력 때문이며, 거기에 얽힌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라면 우리 총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신세를 많이 졌는데 어떻게 반대해?”라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압니다. 여기서 교회와 세상이 갈리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든 사람들에게 좋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 좋게 할 것인가, 사람의 기쁨을 구할 것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할 것인가 하는 선택 앞에서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해야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느 한 교회를 넘어서서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굴복할 것인가 세상을 이길 것인가 하는 결단의 순간에 서있는 것입니다.

내일 최종 판결을 앞둔 우리 총회 재판국이 신사참배 결의에 버금가는 치욕스런 역사를 만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 굴복하는 판결, 돈에 의해 철옹성처럼 단단해진 권력에 굴복하는 판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외면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를 택하는 판결, 그래서 그리스도의 종이기를 포기하고 이 세상의 종이 되겠다는 판결을 우리 총회 재판국이 내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1:10에 썼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일 우리 총회 재판국이 잘못된 판결을 한다면 빌라도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재판을 한 것과 같이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름은 적어도 한국교회사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빌라도의 이름이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전 세계 교회의 예배에서 주님께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자로 반복되어 기억되듯이 말입니다. 우리 총회의 재판국원들로 말미암아 그런 저주스런 치욕을 우리 교단이, 아니 한국교회 전체가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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