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노래제목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지만 무능한 인간은 항상 실수하며 산다. 우리가 수없이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 비참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성경인물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성경인물 중에서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와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실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들의 실수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 본인에게도 치명적이었지만 예수님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베드로와 유다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는 다시금 믿음이 회복되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제자공동체의 리더가 된다. 베드로의 극적인 회복은 가룟 유다의 극적인 죽음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죽음에 대해 사도행전 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다는 자기의 배반행위로 받은 돈으로 밭을 샀다. 그것에서 거꾸로 떨어져서 그의 모든 밸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몸이 튕겨졌다. -사도행전 1장 18절(평양말 성경)
베드로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거꾸로 떨어져 죽었다고 말한다. 유다가 땅에 떨어지자 그의 몸에서 모든 ‘밸’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밸’은 ‘배알’의 준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배알’은 ‘창자’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인데 주로 북한에서 ‘밸’로 줄여 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이나 한민족 모두 ‘배알’을 단순히 내장기관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배알’을 인간의 감정이 거하는 처소로 이해한 것 같다. 그리스어로 창자를 가리키는 말은 '스플랑크논'인데, 여기에는 창자와 내장이란 뜻과 함께 마음과 애정이란 뜻도 함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 사용된 동사에도 '스플랑크논'이 들어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에 ‘창자가 끊어지다’, ‘창자가 미어지다’, ‘창자를 끊다’라는 속담이 있는 이유도 몸의 배알을 인간의 감정이 거하는 처소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하였지만 너무나 다른 인생의 결말을 맞는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종말을 맞이했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용서받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던 베드로의 실패는 예수님 안에서 시행착오가 되었고 그 시행착오를 통해 베드로의 믿음은 더욱더 단단해졌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실패와 절망 속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밸’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예수님의 ‘밸’에 새로운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