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예수님과 사회복지가 좋다
미치도록 예수님과 사회복지가 좋다
  • 김지운 기자
  • 승인 2018.07.27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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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공생재활원장 윤향미 권사
올해 3월 41회 성옥상을 수상한 윤향미 권사. 윤 권사는 목포 초대교회 권사와 공생재활원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지난 3월 41회 성옥상을 수상한 윤향미 권사. 윤 권사는 목포 초대교회 권사와 공생재활원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공생재활원 제공.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 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목포 재활원장 윤향미 권사(72)는 지금도 유달산 고개 마루를 넘어 힘겹게 걸어오며 찬송을 부르던 어머니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치즈코) 여사가 떠오른다. 고무신이 닳도록 걷고 또 걸으며 한국인 보다도 한국 고아들을 사랑했던 일본인 윤학자.

절망에서 기쁨을 찾고 고통가운데 소망을 품었던 윤학자 여사가 이 세상에서 56년 동안 남긴 것은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극복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어머니는 찬송가 95장을 항상 즐겨 부르셨어요. 저녁이면 항상 품에 성경을 끌어안고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빌립보서 4장 12절 말씀으로 궁핍한 현실을 믿음으로 이겨내기 위해 늘 암송 하셨어요.”

윤 권사가 전하는 어머니 윤학자 여사의 가정은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기독교 가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신앙생활을 시작해 믿음의 전통은 외동 딸이었던 어머니에게로, 또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목포의 관리로 와서 일하던 외할아버지를 따라 윤학자 여사도 함께 정착해 젊은 시절을 보내다 윤치호 전도사를 만나 고아들을 위해 음악 교사로 헌신하다 결혼하게 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한국전쟁 당시 도청이 있는 광주에 쌀을 얻으러 갔다가 실종되셨어요. 아버지는 마산 목공소에서 외국 선교사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목포에 와서 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23세의 나이에 걸인 7명을 모아 시작한 것이 공생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아버지 윤치호 전도사는 “하나님 저도 이웃을 위해 사는 나사렛 목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기도의 소망대로 7년 후 목포 호남동에 나사렛 목공소를 세웠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각오로 결혼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4남매를 허락 하셨어요.”

윤치호· 윤학자 부부는 어렵게 얻은 자녀들이었음에도 고아들을 더 사랑했다. 윤 권사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고아들이 자녀들 보다 더 잘되는 것을 꿈으로 알고 사신 분들’이었다.

실제 윤 권사는 어린 시절 공생원생들과 같은 시설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랐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모두 고아들과 똑같았다.

반찬도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예사였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아파했던 윤학자 여사.

1968년 5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공생원 출신의 자녀들이 몰려와 함께 슬퍼했고, 목포의 시민들도 함께 울었다. 목포시민장 1호가 윤학자 여사였고, 이후로 시민장이 열리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윤 권사의 4형제는 부모가 보여준 믿음과 헌신적 삶을 그대로 이어받아 공생원을 지켜냈다. 그리고 오늘의 공생복지재단을 일구어냈다.

음악치료지원사업으로 3차 발표회를 하고 있는 공생재활원생들. 윤 권사는 장애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언어가 안되지만 단어 하나 하나가 모여 노래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말했다. 공생제활원 제공.
음악치료지원사업으로 3차 발표회를 하고 있는 공생재활원생들. 윤 권사는 장애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언어가 안되지만 단어 하나 하나가 모여 노래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말했다. 공생제활원 제공.

윤 권사는 “다시 태어나도 예수님 믿을 거에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사회복지할 것입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예수님, 정말로 좋아하는 사회복지. 부모님이 좋아하는 예수님과 복지가 미치도록 좋아요”라고 말한다.

윤 권사는 공생원에 직원으로 있다가 결혼을 했다. 이후 남편이 인수한 서울 직업훈련학교를 위해 돕다가 1994년 오빠가 오사카에 양로원을 설립한 것을 돕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2000년 4월 지금의 공생재활원에서 헌신해 왔다.

윤 권사의 여섯 딸들도 어머니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배우며 걸어왔다. 그래서였을까? 목회자 사모로, 사회복지사로, 유치원장으로, 발레리나로 성장했다.

“하나님이 키우셨어요. 특히 발레 하는 딸은 돈 하나 들이지 않고도 선화여중고, 이화여대를 다녔어요. 딸들 모두 믿음이 좋아요. 하나님이 길러 주신 것입니다”

정년을 앞둔 윤 권사는 아직도 꿈을 꾼다. 정년 후에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처럼 힘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단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복음이 필요한 곳에 서겠다는 윤 권사가 찬송가 384장을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 하리요”

지적 장애인을 사랑하고, 미치도록 예수님과 사회복지가 좋다는 윤 권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또 하나의 기적이 기대된다.

공생재활원은 목포 고하도에서 2017년 기적과 같이 연산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윤 권사는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공생재활원 제공.
공생재활원은 목포 고하도에서 2017년 기적과 같이 연산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윤 권사는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공생재활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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