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은 가을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는 건 상쾌한 일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건 참으로 아쉽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이 떠나고 겨울이 찾아올 수 있으니 오늘 할 수 있는 가을 산책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의 로만 가톨릭 수녀 조이스 럽이 집필한 『느긋하게 걸어라』는 그녀가 직접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영적 깨달음을 적은 책이다. 그녀는 60세 생일을 즈음하여 20년 지기 목사와 함께 37일간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당연히 그 순례의 여정은 고생 그 자체였다. 매일 짐을 싸고 풀고 수십km를 두 발로 이동하는 과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고된 여정을 통해 안락한 미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그녀는 이 깨달음을 글을 통해 타인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자 했다.
“나는 카미노 여정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나누어야 할 ‘비범한 경험’이었고 나는 거기서 돌아온 자였다. 내 간절한 바람과 뜻은 이 나눔으로 ‘공동체에 깊은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내가 몰랐던 것은 그 교훈을 모으고 쓰는 과정에서 그것이 나에게도 한층 더 절절하고 생생해졌다는 것이다. 선물이란 베풀수록 그 유익이 본인에게 돌아오는 법이다.” (20쪽)
만약에 어느 독자가 『느긋하게 걸어라』를 읽으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실용적인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그 독자는 정보를 얻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이스 럽은 『느긋하게 걸어라』를 날짜순으로 집필하지 않고 날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집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된 실용서가 많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이 책에서 굳이 정보를 많이 제공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 책에서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고귀한 정신을 공유하길 원했다. 바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고귀한 정신 말이다.
“그때 톰이 ‘프리메로 디오스(Primero Dios, 하나님을 첫 자리에)’라는 스페인어 문구를 기억해 냈다.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국은 다 잘된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무슨 일로든 걱정하는 말을 할 때마다 이 문구를 주장하기로 했다.” (302쪽)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고된 순례의 여정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이것을 왜 하는지 그 본질적 목적을 상실하기 쉽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지 않고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순례길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조금 더디고 느릴지라도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고 주님의 임재와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는 걸음걸이가 복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리메로 디오스’라는 문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카카오톡 배경에 이 문구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매일 그 문구를 떠올리며 삶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고자 노력한다. 우리가 모두 산티아고 순례길을 직접 걷는 건 힘들 수 있지만, 어디서나 ‘프리메로 디오스’를 실천할 수는 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걸음걸이가 우리를 천상의 순례자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