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꽃이 폈다. 포도나무를 한 그루 얻어 마당에서 키우기 전에도 와이너리에서 포도나무를 수없이 봤지만 포도 꽃은 그닥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 보다는 새순이 나오고 줄기가 뻗어나가는 모습이나 콩보다도 작은 포도송이가 맺혀 점점 커지는 모습, 포도알 색이 검붉게 또는 투명한 청포도로 익어가는 모습을 봤다. 또는 날이 차가워지면 포도잎이 울긋불긋 물들어 땅에 떨어지고, 갈색 나무가지가 다 드러난 겨울에는 비가 쏟아져 겨자꽃이 포도밭 바닥을 노랗게 가득 채운 이런 광경을 즐겼다.
한 해 포도밭 풍경 중에서 포도 꽃은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중요하다. 색깔도 여린 연두색이라 새로 자라는 잎사귀와 뒤섞여 있으면 애써 찾아야 한다. 다만 꽃이 가득 피었을 때 포도나무 옆을 지나가면 그 상큼하고 향긋한 내음을 놓치기는 어렵다. 하루가 다르게 무성히 자라는 포도나무 가지와 잎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이유는 올해 포도가 얼마나 어떻게 열릴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봄 포도나무 가지에 순이 나오고 대개 6~13주가 지나면 포도 꽃이 핀다. 여느 꽃처럼 암술과 수술이 있고 향기로운 꽃물도 나오고 꽃가루도 나지만 연구 결과 곤충이나 바람의 역할은 거의 없이 자가수분(自家受粉)으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게다가 모든 포도 꽃이 포도 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략 30%만이 열매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과학이 발전해서도 열매가 맺히는 일이 유기적인 요인이 큰 지 호르몬 영향이 더 큰지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기후 영향을 받는다. 날이 너무 뜨겁거나 바람이 세차거나 지나치게 춥거나 비가 많으면 열매 맺는 일이 어려워진다. 이 역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서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마른 다음 노아가 땅을 갈아 첫 포도나무를 가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세기 9장 20절). 노아가 가족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왔다. 그리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정결한 번제물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모든 살아있는 것을 홍수로 없애지 않겠다 하시고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8장 22절) 하셨다. 그리고 노아, 모든 이들과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으셨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 다시 말해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나는 당연한 일에 사람이 하는 일이라곤 가지를 치고 물이 너무 부족하지는 않은지 병충해가 있는지 살피고 때가 되면 익은 포도를 따먹을 뿐이다. 성례전에 임할때 우리는 이 포도주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겨우내 추위를 견뎌낸 포도나무는 봄의 기운이 돌아온 땅 속 깊은 곳에서 뿌리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모든 가지끝까지 보내고 순을 틔운다. 새 가지가 뻗어나가 거기서 꽃이 생겨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고 포도알 하나하나는 여름내 뜨거운 태양을 가득 품어 안는다. 이윽고 추수 때가 되면 우리에게 그 달콤하고 향긋한 즙을 내어준다. 이 포도즙이 포도알 겉에 묻어있는 효모와 만나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 포도주가 된다. 한 해에 단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포도 꽃 향기가 휘감기는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을 기억할 일이다. 인류의 첫 포도밭지기 노아도 이맘때면 포도꽃 향기를 맡고, 포도송이가 달리면 여름내 가꾸며 포도주 만들 기대를 마음에 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