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본 가스펠투데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적게나마 이 신문에 참여하고 있는 입장인데, 전체적으로는 사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신문을 여러 관점으로 되짚어도 보고 앞을 향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신문이 창간되던 당시부터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감사한 마음이 많습니다.
해외의 한인교회까지 포함한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21세기를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세계 교회는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코로나19로 촉발되었지만, 그 물결이 사실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이미 크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누구나 인식하며 이러저러하게 나름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가스펠투데이’, 2017년 늦가을에 이 이름에 조금은 생경하게 그러나 차츰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영어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면 두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 오늘의 세계입니다. 신학의 임무는 복음을 각 시대에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증이라고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말하면 선교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가진 사명이 이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각 시대에 전하는 것이니, 표현은 달라도 변증과 해석이라는 신학의 임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논의가 많습니다. 좁은 의미의 전도를 중심에 품고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입니다. 교회는 선교해야 한다, 선교해야 교회다, 이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서 ‘교회가 선교다’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이런 본질적인 의미의 선교에서 두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복음과 상황입니다.
먼저 복음에 관해서 봅시다. 복음은 근본적이고 거룩한 ‘본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를 중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시하신 66권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그 본문의 심장에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 본문을 이해하고 깨닫고 살게 하십니다.
이 본문에 관한 집중력이 떨어지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약해집니다. 66권 성경책이라는 현상적인 구체성에서 멀어질수록 교회는 복음을 잃어버리고 교회다움을 상실했습니다. 흔히들 암흑시대라고 일컫는 중세 교회뿐 아니라 어느 시대의 교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말씀에서 멀어진 상황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과 악행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상황입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문명사적 전환기입니다. 한 세기, 곧 100년이 지나면서 겪게 되는 변화를 세기적인 또는 세기말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또는 지금 사는 사람들은 천 년이 넘어가는 시간을 겪었습니다. 밀레니엄과 연관된 변화가 여러모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세기나 천 년은 달력의 객관적인 흐름에서 구분된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는 ‘문명사적 전환기’는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엄청난 변화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역과 교회의 헌신은 결코 상황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복음과 마찬가지로, 상황에서 동떨어지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어버립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께 올린 간절한 기도문이 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늦저녁에 올린 기도입니다. 3년의 공적 사역을 마무리하는 기도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할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상 한가운데 있는 존재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섬처럼 존재하면, 타락입니다. 교회가 자기 집단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면, 본질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고백 위에 세우시는 교회도 타자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가스펠투데이, 나에게 이 신문은 이렇듯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복음과 상황에 관한 기독교적인 인식과 헌신으로 탄생했고 또 그렇게 걸어가려고 애쓰는 귀한 신문입니다. ‘가투’는 이렇게 과거에 연관된 인식과 헌신, 이에 근거하여 미래를 희망하는 용기와 전망,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끌어안고 있는 지금 여기 현실 속에 서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문을 위해 기도하고 십시일반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가투는 하나의 신문으로서 일반적인 모든 언론이나 기독교 언론과 다를 바 없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언론의 역사에서 늘 논의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언론의 보도에서 사회적인 공정성과 객관성을 어떻게 지켜나가며 언론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현관하여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가 두 가지 곧 자본과 제도입니다.
먼저 언론 자본, 곧 돈 문제입니다. 사람은 숨만 쉬고 존재해도 비용이 듭니다. 인간사의 기본적인 상황입니다. 언론사를 꾸려나가는 일에 돈이 듭니다. 자본을 끌어오고 운용하고 그에 근거해서 사람을 채용하고 배치하는 등의 일이 경영입니다. 언론에 관해서 고전적인 명제가 있습니다. ‘경영과 편집이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당연히 맞는 말이고 또 그렇게 돼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언론의 역사에서 그 어떤 언론 기관도 그것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비용, 곧 언론 자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돈의 힘이 언론의 보도를 왜곡하는 일이 많습니다. 정론(正論)-직필(直筆)이 현장 기자를 비롯한 모든 언론인이 바라는 것이지만, 현실은 곡필아세(曲筆阿世)가 넘쳐납니다. 학문 세계의 타락으로 말하면 곡학아세(曲學阿世)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언론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거대 언론 자본이 정론과 직필을 가로막습니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편집에 간섭합니다. 한 언론이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가치관을 표방하면서 작동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특정 목적을 위해 대놓고 보도를 왜곡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돈과 연관되지만 조금 다른 측면도 갖고 있는 문제가 제도입니다. 교계 언론은 특히 여기에 더 연관성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특정 교단에 속한 교단 신문들 또는 그런 방송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언론은 그 교단의 신학이나 입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교단의 어떤 부정적인 문제를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 흔히 쓰는 핑계가 ‘선교’라는 것입니다. 교단 신문이나 언론은 일반 언론과 달라서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성경적으로 지지받기 힘듭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비롯해서 성경의 여러 책에는 죄와 치부를 드러내는 아주 강한 책망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교계 언론이 제대로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가투가 자본과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성경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사실을 보도하고 심층 취재를 통해서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를 제대로 서게 하려고 선택한 방법이 협동조합입니다. 현재 가투는 사회법상으로 ‘한국교회언론협동조합’입니다. 이런 형태의 모습에서 자본과 제도에서 자유롭게 되고 자주, 자립, 자치의 길이 열립니다. 언론의 공공성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발전시켜 오고 경험한 모든 정치 제도 중에서 성경에 가장 가까운 것이 민주주의인데, 협동조합 형태의 언론사 운영이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나 운영을 가능하게 합니다.
협동조합의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와 뜻을 함께하는 조합원이 많아지는 것, 조합원들이 소액을 출자하여 신문사의 경영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자본이 모이는 것, 그 자본을 내부의 합리적인 경영과 감사를 통해 적절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가투는 창간 이후 지금까지 어렵게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옆에서 보면, 어려운 상황이 많았을 텐데, 어떨 때는 비틀거리기도 하는 것도 같은데, 용감하게 잘 걸어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백 수십 년의 선교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회직 세습, 공교단 총회장의 성적인 비리, 대형 교회의 재정적인 사고들, 전통적인 교단 신학대학들의 내홍과 정치권력 싸움들 …. 얼른 생각해도 줄줄이 떠오르는 이런 슬픈 현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요? 한국 교회의 출구가 어디입니까? 지금 걷고 있는 어둡고 추운 길이 터널이라면 좋겠습니다. 터널은 반대쪽 출구가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굴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절망이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물론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희망하는 근거는 사람이나 삶의 상황이 아닙니다. 탐욕스런 인간 역사 속에 개입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시 광야로 나갈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절에 자본이나 제도 등 아무것도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복음의 희망만 바라보고 길을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그 길을 나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앙의 고향이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곳, 그런 시공간,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만 붙잡고 걸어야 하는 곳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민족이 타락해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표현은 여러 가지이지만, 광야로 돌아가라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이 힘을 얻은 곳도 광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활동 무대가 광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적인 사역에 나서기 전에 광야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깊이 묵상하시며 소명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복음과 세계를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탄생한 가스펠투데이가 지금 이후로 걸어갈 길은 분명합니다. 한국 교회가 잊어버린 곳, 잃어버린 그 신앙의 고향, 광야로 앞장서서 걸어가야 합니다. 아직은 광야로 가야 하는 이유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광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알지만, 가려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먼저 이 길로 나서야 합니다. 창세 이후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 초대교회 이후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걸었던 길, 종교개혁자들이 온몸을 던져 한 걸음씩 걸어간 길, 광야의 길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가스펠투데이가 먼저 깃발을 들고 일곱 해 전에 이미 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스펠투데이에 응원을 보냅니다. 기도로 동역하고 적은 힘이나마 동참하겠습니다. 가투를 섬기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깊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