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초입인 9월이 되면,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개최한다. 교단총회는 교단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 의결기관으로 교회의 방향과 신학적 입장을 점검하고,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의결하는 자리다. 대부분의 교단총회는 스스로 거룩한 총회, '성(聖)총회'라고 지칭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 나라의 추구’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욕망과 수치, 대립이 난무해 사회 일반 단체의 총회보다 상식 이하로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교단총회가 교회의 축제처럼 멋지게 진행되어 한국 사회가 기뻐하며 소망을 갖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교단총회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마치 정치적 권력 다툼이나 자파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는 전투장처럼 보인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논의하기는커녕, 특정 인사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각종 의제는 형식적이고 부총회장을 비롯한 임원 선거가 주요 의제로 전락하고 있다. 그로 인해 리더십 교체나 인선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때로는 불투명한 절차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총대들은 소속 교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소수 인사들의 독무대 속에서 의사결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나도 목사로 안수받은 지 34년이 되었고, 봄에 열리는 노회의 정기총회에 종종 참석하는데, 노회가 가을의 교단총회에 파견할 총대 선출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와 같은 기관목사나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는 안중에도 없고, 큰 교회의 담임목사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요한 목사들이 주로 총대로 선출되는 현실이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라면 노회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선출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어느 교단에서는 여성 총대를 노회별로 최소 1명 이상 선출할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노회가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 교단총회의 총대를 벼슬처럼 여기는 명예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장자 교단을 자처하는 한 교단은 교단총회에서 헌법에 세습금지를 명시했지만,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를 아들 목사에게 대물림하는 것을 허용했다. 심지어 세습금지 자체를 위헌처럼 취급하며 면죄부를 주려 한다. 헌법에 세습금지를 반영할 때는 교인들의 정서와 한국 사회의 상식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습금지 자체를 폐지하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몇몇 대형교회가 세습을 결행한 후 교단을 탈퇴한 것이 교단에 손실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세습금지 조항과 관련해서 개교회 교인들의 의견을 수렴했는지도 의문이다. 정치적 목사들의 농간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한국교회의 교인 수는 이미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거나 기독교인임을 거부하고 무종교인이 되는 교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총회마다 교인수 증가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는 거의 없고, 감소 상황만 보고되고 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적 기관인 하나님의 교회를 사적 소유물처럼 세습하는 일부 대형교회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탁월해야 할 목회자들의 일탈적 행위들, 교회 재정의 불투명한 사용, 교회 내의 여성 차별과 비민주적인 운영 등이 그러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교단총회에서 중요한 의제 중 하나가 사이비 이단을 규정하는 것이다. 교주를 신격화하고, 신도들을 가스라이팅하며 노예처럼 부리고, 정상적인 가정을 파괴하고, 일탈적 행위를 강요하거나, 건강한 일상적 삶을 방해하는 등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사이비 이단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조차 돈과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교단총회가 황금만능주의를 벗어나고,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하며,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고,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개혁해 성총회를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역할과 선한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