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8월에는 <하나님께서 도시에서 찾으시는 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다.
도시는 인간의 아성으로 출발했지만 다윗성처럼 예배의 심장이 될 수도 있고 예루살렘처럼 교회의 터전이 될 수도 있고 안디옥처럼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에 하나님 나라 임하소서!” 그리고 그 헌신의 물꼬를 틀 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1절) 당시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여정을 지나 요단강 근처 싯딤에 도착했다. (지도) 싯딤이 요단 동편 10km, 여리고가 요단 서편 8km에 있었으니까 서로 대척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면 가장 먼저 마주할 성읍이 여리고였다. 여리고는 가나안 진입의 관문이었다.
여리고는 인류사에서 최고(最古)의 성읍이며, “달의 도시” 내지 “향기로운 자리”라는 뜻이다. 달을 숭배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남으로 이집트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아라비아와 가나안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또한 광야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갖고 있어서 대상들의 중간 기착지이자 국제 교역의 장으로 역할을 했던 정말 매력적인 도시였다. 경제력과 방어력이 탁월했던 여리고는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세워져 있어서 3천년간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런 난공불락 여리고를 공략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만 보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었는가? 40년 전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었는데 그들이 불신의 보고를 함으로써 백성들이 불순종하도록 만들었고 40년간 광야를 돌지 않았던가! 그 12명은 각 지파의 대표였으니 얼마나 민주적이었는가! 하지만 그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고백을 했고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 이 시대도 동일하다. 한국교회를 다시 살려내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의 고백을 드릴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두 명의 정탐꾼이 왜 하필이면 기생의 집에 들어갔을까? 1. 많은 외지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2. 여행객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3. 그 집이 여리고의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을 정탐하기에도 좋았겠고, 성에서 탈출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2-3절) 그러나 이미 여리고 성의 경계 태세는 삼엄했다. 이스라엘이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첩자들이 잠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왕은 여인숙의 주인 라합에게 “네 집에 찾아온 첩자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생각해 보라. 여리고의 왕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고, 여리고의 주민으로서 라합은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상 행동을 한다.
(4-7절) 라합은 두 사람을 숨겨줄 셈이었다.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 줄기 밑에 숨겨두고 이미 떠났다고 말함으로서 여리고 군인들이 이스라엘 첩자들을 찾다가 헛수고를 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로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 이유가 라합의 대사에서 나온다.
(8-10절)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1. 여리고성은 당신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아니 아직 이스라엘이 포위한 것도 아니요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자신은 결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2. 여리고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3. 홍해도해와 동편에서의 승리를 들었다. 아니 여리고에 사람들이 많은데 라합만 이런 생각을 했겠는가. 이미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국 애굽도 감당치 못한 민족, 요단 동편의 최강자였던 시혼과 옥도 감당치 못한 민족임을 알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는가. 인간은 두 가지 잘못된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1. 상대적 당위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무슨 말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당위성으로 다가오는 일들이 있다. 우리가 여리고에 사는데 “우리 성읍이 이겨야지. 우리나라가 이겨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올림픽 경기에 다른 나라 응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이 내적으로 느끼는 당위성이다.
하지만 상대적 당위성 위에 절대적 당위성이 존재하는 법이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상대적 당위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나요?”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당위성이라는 말 자체가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 아닌가. 그래서 어제 구글에서 검색을 해 봤는데 상대적 당위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없더라. 전 세계 사람들 중에 쓰는 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실제로 존재한다. 당위성의 사전적 개념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세계에서의 당위성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 당위성에 목을 매느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절대적 당위성을 간과하는 순간 인간은 큰 판단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당위성이다. 하지만 무슬림 집안에서 명예 살인하겠다고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라고 하면 순종하는 것이 맞는가? 그래서 성경이 말씀한다. (엡 6: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주 안에서, 즉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절대적이고 상위적인 개념이라는 말씀이다.
형제님들에게 권면드린다. 아내 말을 잘 들으셔야 한다.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보는 남편 없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다. 남자는 모험을 추구하고 여자는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내의 잔소리는 여러 모로 남자의 위기관리(risk-management)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중동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엡5: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무슨 말인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되 그보다 상위적인 개념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집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어야 하겠는가? 남편도 아내도 아닌 주님께 있어야 한다.
제가 전임전도사 때 큐티사역을 맡으면서 월요큐티집회를 시작했다. 선배 목사님들이 왜 월요일에도 집회를 만드느냐고 타박하셨다. 하지만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집회였다. 몇 달은 수석목사님들을 설교자로 모시고 했지만 그 이상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집회가 잘 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주님이 “왜 이 집회가 잘 되어야 하니? 네가 맡은 일이라서 그러니?” 제가 기도하면서도 아무런 영적 당위성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 일이기에 잘 되게 해 달라던 이기적인 마음을 철저히 회개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흥을 주셨다!
여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깨닫고 항복했어야 됐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들만의 당위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부실기업인데도 어떻게든 잘 되어야 할까? 내가 목회하는 교회니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부흥해야 할까? 이런 잘못된 상대적 당위성이 결국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만들어서 자신도 조직도 망하게 만드는 불행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인간은 두 가지 잘못된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2.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생각해 보라. 두려우면 정직하게 인정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을 떨쳐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그 생각의 늪에 빠져든다.
10여 년 전 입시철에 한 집사님이 자녀가 교육학과에 지원했는데 면접이 이틀 앞이고 10분 발표를 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해서 아이를 그날 당장 만났다. 그러나 아이가 상담실에 걸어 들어오는데 너무나 훈남이었다. “넌 이렇게 잘 생겼고 인상도 좋은데 뭐가 걱정이니?” “제가 면접에서 한 번도 안 떤 적이 없어요.” 30분간 이런저런 말로 권면해도 아이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미 두려움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가 확실한 예언을 하나 해 줄게. 너는 이번 면접에서도 떨 거야.” “예?” 아니 그런 얘기 들으러 왔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봐. 교육학 분야 최고의 교수님들이 앉아 있는데 네가 발표하면서 안 떠는 게 이상한 거 아니니? 그냥 떨린다고 인정해. 그냥 떨린다고 말해. ‘나 이번에 떨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그럴수록 늪에 빠지는 거야. 발표 시작하면서 떨리잖아 그러면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려니까 떨립니다’라고 말해버려. 인정해 버려. 그 순간 자유해질 거야. 그리고 나머지 하면 되.”
실제로 면접일에 아이가 떨었을까 안 떨었을까? 당연히 떨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려니까 떨립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이 웃으시면서 “괜찮아. 여기 와서 안 떠는 친구가 어디 있어. 편안하게 해라.” 교수님들이 웃으니까 학생도 씩 웃고는 너무 맘이 편해진 것이다. 그래서 나머지 발표를 잘 마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두려움 너머의 삶]이라는 좋은 책이 있다. 대부분의 두려움 관련 기독교 서적은 “신앙인이라면 두려움을 물리쳐야 한다! 떨쳐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나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인생에는 당연히 두려움의 파도가 계속해서 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파도를 믿음이 있는 사람은 넘어설 수 있다!
1차 대전 미국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에디 리켄베커(Eddie Rickenbacker)가 기자들의 말에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 두려움이 없는 용감한 조종사이군요?” “아니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도 공중전은 피를 말리는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믿음을 갖고 두려운 현실을 더 냉정하게 직시하며 뚫고 나갈 뿐이었다. 두려움은 현실을 왜곡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직시한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눈 질끈 감고 물맷돌을 던진 것이 아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의 위용과 실력이라는 현실을 직시했다. 이 현실적인 팩트 체크 때문에 사울왕의 칼과 갑옷을 포기하고 물맷돌을 선택했다. 그가 두려워서 칼과 갑옷을 선택했다면 그는 패배했을 것이다. 마찬가지였다. 여리고는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것이 사탄이 두려움을 사용하는 전략이다. 두려워하면 결국 그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현실은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믿음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리고의 두려움이 아니라 라합의 믿음이 필요하다.
(11-13절) 라합의 이어지는 말들은 더더욱 놀라웠다. 4.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5. 너희를 선대하였으니 내게도 선대하라. 상천하지에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무슨 말인가? 고대 중근동의 사람들도 다 만신전의 신들을 섬겼고 자기 민족신을 섬겼다. 그런데 역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하나님과 같은 다른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라합은 어떻게 이 사실을 깨달았을까? 기생으로서 라합의 삶이 어떠했겠는가? 이 도시 여리고에서 가장 차디찬 밑바닥 삶을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그런 그녀에게 여리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전혀 없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이 두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언제나 최고의 화가들도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서 그림을 시작하는 것처럼, 정직한 자기 비움이 채움의 시작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직시하는 사람이 반전의 승리를 거두게 될 줄 믿는다!
예수님 시대에도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주님께 쓰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구원받고 쓰임 받았다. 성경의 역사를 볼 때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 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 땅에 붙잡을 꿈도 이상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붙잡을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알았다. 그런데 자신만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여인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다! 자신뿐 아니라 오는 세대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이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사실 라합은 여리고 입장에서는 배신자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충성된 사람이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유대교를 지키는 것이 당위성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복음의 훼방꾼들이 되었다. 한국교회 입장에서는 교회 전통을 지키는 것이 당위성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예배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훼손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애통한 일이다! 1516교회가 주일예배에 대표기도도 성가대도 없앤 것은 형식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에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 1년여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때에 그 다음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다. 물론 교회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역동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시마다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는 인간의 아성이요 여리고처럼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선포하는 라합과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신다!
인간에게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다. 그것이 심리적 당위성이다. 그래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자기 조직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선다. 그러나 그것은 여리고의 선택이다. 우리는 라합의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셨듯이,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다들 좋아하지만 사실 교회가 부흥하면 좋으면서 싫다.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좋은가? 왜 좋은가?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서인가? 그러나 그러면 익숙한 곳에서 떠나야 한다! 나의 기득권과 편안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 한 새신자 커플이 순배정을 받아 첫 모임에 갔다고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했다. 순장님이 “다음 주부터는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는 20년간 교제한 순이라 새가족이 오는 것이 불편하다.” 이것이 교회다. 아니 이것이 교회인가?
교회는 피난행렬이다. 세상 풍파를 피해 교회로 피신해온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 또한 교회는 전투부대다.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 위험한 전투현장에 달려가야 한다.
제가 대학생 시절 캠퍼스에서 기독인모임을 인도하고 친구들을 전도하고 캠퍼스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 단 한 사람 믿음의 동역자를 주소서! 그러면 이 캠퍼스를 드리겠나이다!” 저는 도시마다 가는 곳마다 기도한다. “하나님,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 라합을, 다윗을, 루디아를 만나게 하소서! 이 도시의 영적 기상도를 바꿀 사람을 만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