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 목사의 말씀 산책 (2)] “불확실성의 시대에 누리는 평안”
[이상준 목사의 말씀 산책 (2)] “불확실성의 시대에 누리는 평안”
  • 이상준 목사
  • 승인 2024.06.2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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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9-29

오늘날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는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고, 과학문명의 발전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임에도 인간성 상실과 인간 영혼의 황폐화로 가고 있으며, 갈수록 인간 고립은 심화되고 불행과 우울과 절망의 역병이 돌고 있고 묻지마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의 시대에 평안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며 인생을 살고 있다. 왜냐면 남보다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일하고 좀 더 성공해야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극도의 경쟁사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경쟁을 부추겼는가? 경쟁하면 좀 더 잘 살 수 있다고 누가 말했는가? 경쟁하면 좀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누가 말했는가? 성경은 어디에도 경쟁하며 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쟁이나 비교우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인간을 상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서로 경쟁을 부추긴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의 거짓말이다. 또한 절대로 절대적 평안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리게 만드는 사탄의 거짓말이다. 참된 평안은 절대자 안에 완전히 들어가야 얻어진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예측 불허의 불안정한 사회와 역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이미 예언했고 예상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지구 환경이 무너져가고 생존의 위협지점까지 가도 인간은 경쟁을 멈추지 못하고 전쟁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께 돌아와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되기 전까지는. 왜? 불안만큼 사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19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동안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두문불출 두려워서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마가의 다락방은 더 이상 따듯하고 행복한 추억의 자리가 아니라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잡아 죽일까봐 두려웠다. 두려움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는 공간 안으로 예수님이 이동해 들어오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선재성을 가진 성자이실 뿐 아니라 부활 능력으로 육신도 살아나신 상태였다. 그리고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인사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이다. 우리가 만나면 “안녕!” “안녕하세요!” 말하는 것과 같다.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말이다. 왜냐면 지금 제자들은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전혀 평안하지 못한 사람에게 지금 “안녕하신가요?” 라고 질문하는 것은 실례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사말은 진심이었다. 불안감과 불확실성과 부적응감에 빠져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인생들에게 절대자이신 그분, 절대 평안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평안할지어다!” 선언하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예수님의 이 인사말이 너무나 좋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왜냐면 제 인생의 간증을 하자면, 가난하고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모태로부터 한 번도 평안이라는 것을 누려본 적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저에게 처음으로 평강이 무엇인지를 경험시켜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가난과 우울과 자살충동에 빠져 있는 내게 말씀으로 다가오셨다. (엡1: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경의 바로 이 구절을 읽어 내려갈 때, 평강이라는 단어가 파도처럼 밀려와 내 영혼을 덮는 거대한 해일이 되었다. 그 순간 내 몸이 뜨거워지면서 내 안에 있던 모든 불안과 절망과 어둠이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다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파도쳐 내려오는 샬롬이 내 영혼을 덮었다. 할렐루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안! 상대적 존재가 상대적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평강이 임했다! 절대자의 절대 진리 안에서 절대 은혜와 절대 평안을 누리는 영혼의 희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이미 죽음을 경험하신 예수님은 오히려 평안하시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있던 제자들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일까? 인간의 가장 큰 존재적인 불안은 내가 죽을 것 같은 것이다. 경쟁에서 밀리면 죽을 것 같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불안해서 죽을 것 같고, 회사에서 갑질과 횡포를 당하면 벼랑에서 떨어질까 불안해서 죽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불안함 때문에 사람이 더 열심히 더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기도 하지만, 그 불안함이 극도로 심해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기도 하고 아예 경쟁과 비교가 없는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 자폐적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고 불안감과 실패감에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되어서 묻지마 칼부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도 여러분, 왜 불안해하는가?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내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드린 사람은 불안해할 것이 없다. (갈2:20상)“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아멘!

(20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왜냐면 그것이 부활의 명확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죽음의 사선을 넘어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 사선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21-23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 번째로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첫 번째는 인사말이셨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파송명령을 하시면서 주시는 평강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정말 제자답게 살려면 상대적 세상에서 상대적 존재로 서로 경쟁하며 살면 안 되고, 상대적 세상에서도 절대자의 절대 복음, 절대 은혜, 절대적 사랑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찬양팀은 누가 더 노래를 잘 하는가가 아니다. 설교자는 누가 더 설교를 잘 하는가가 아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부르심으로 살 수 있는가? 이것만이 제자의 삶에 유일한 기준이다! 그 기준을 따라 살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평안하다!

그래서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 진리의 영, 절대 평안의 영이신 성령님, 내 안에 임하여 주옵소서!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숨을 흙에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과 죄악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고 인간은 껍데기만 남은 존재가 된 이후로 극도의 불안을 이겨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도시문명과 엔터테인먼트와 화려한 예술로 가려보려고 해도 우리 영혼의 저체온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오직 예수님을 1:1로 인격적으로 만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만 해결된다.

저는 이 시대 한국교회의 부흥도 간절히 바라지만, 성도 여러분 개개인의 부흥도 간절히 바란다. 예수님을 먼 발치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1:1로 만나 인격적인 사귐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세상 어디서든 평안한 심령이 되시길 축복한다!

(24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 가운데에 도마는 없었다. 그렇다면 도마는 왜 없었을까? 모두가 두려워 문도 걸어 잠그고 외출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도마는 혼자서 겁 없이 돌아다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다니! 이럴 수는 없어!” 그래서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도마는 “어차피 다 끝났어! 뭘 더 주저하겠어!” 이상주의자들이 겪는 고통과 달리 도마는 현실주의자가 빠지는 냉소와 냉담에 빠져 있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만나러 가시겠다고 갈릴리에서 출발하신 적이 있다. 당시 유대지역에 반대자들이 많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때였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지금 유대 지역에 가시는 건 위험한데 어떻게 하지 걱정은 되지만 아무도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요11: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남들이 못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너무 충동적이어서 말을 내뱉는 사람이라면, 도마는 너무 상황판단이 빨라서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도마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유대지역을 가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장차 왕이 되셔서 세상을 개벽하시리라고 기대했지만, 도마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는 순간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던 것이다.

햄릿 같은 이상주의자 즉 절대주의자들은 자기 가정에서 일어난 부도덕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그런 절대적 기준, 절대적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너지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한다. 저도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청소년기에 그런 절대적 이상이 사라지니까 자살을 생각하고 죽음을 원했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도마와 같은 현실주의자는 결코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게 냉소적이 될 뿐이었다.

그도 한때는 예수님께 인생을 올인했다. 그러나 “세상 뭐 대단한 게 있는가? 세상에 무슨 절대적인 것이 있는가? 결국엔 하나님 나라의 이상도 현실에서는 안 되네.” 현실의 장벽 앞에서 도마는 그냥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을 뿐이다. 그렇게 한때는 교회에 헌신해서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다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에 실망하고 냉소주의에 빠지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두려운 게 아니다. 절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교회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 것뿐이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전하는데도 도마는 내가 직접 검증해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말한다. 왜였을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른 제자들은 펑펑 울고 난리가 났었잖은가. 하지만 도마는 “그래 나도 설마 했는데 이게 현실이 되네. 내가 그랬잖아. 예수님 죽으실 것 같다고.” 그도 충격은 받았지만 예상은 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지만 도마는 의심의 늪에 빠져 있었다. 도마가 볼 때,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절망과 두려움이 극심하다 못해 집단 착란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었다. 오늘날에도 종교 집단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수많은 도마들이 교회는 다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교회를 관망만 한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아무리 눈물로 감격으로 말해줘도 속으로 ‘나에겐 안 통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도 그렇고 도마도 그렇고 모두 실증주의자들이다. 내가 직접 검증해 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게 똑똑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다만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왜? 내가 세상의 기준점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주관적 감정이나 집단 광기에 빠지지 않겠다. 객관적 시각으로 내가 판단하겠다”고 말하면서 절대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는 자신만의 적정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6절) 일주일이 지나서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당연히 첫 인사말이니까. 그러나 또한 도마의 영혼이 불안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제자들처럼 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도마의 영혼이야말로 불확실성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영혼이었다! 내가 절대자도 아니고 절대기준도 아닌데 내가 기준이 되어서 사는 인생은 자기모순에 갇혀 있는 법이다! 그러니 도마는 서서히 영혼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가장 불안한 상태였다.

(27-29절) 감사한 것은 그런 도마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실증해 보라고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와 같은 현실주의자인 당신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실증을 하고라도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신앙의 냉담에 빠진 당신이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내가 모든 것을 검증해 보겠다고 고집하고 나는 절대 집단 광기에 빠지지 않겠다고 말하느라, 그렇게 예수님과의 거리를 두고만 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결국 도마에게 주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지만 즉 실증해서 믿는 것이지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이 복되다!” 실증이 필요한 분들은 꼭 실증하고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거리만 두고 의심만 하고 냉담에만 머물지 말라. 꼭 성경통독도 하고 질문도 하고 답을 찾아가라. 결국 제자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뒤 가장 먼 인도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 순교한 사도가 되었다. 결국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었다!

이상준 목사<br>​​​​​​​1516교회 담임<br>
이상준 목사
1516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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