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유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에큐메니즘
가계와 유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에큐메니즘
  • 엘리자베스 언더우드 박사
  • 승인 2024.06.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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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언더우드 박사(이스턴 켄터키 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상. 뒤의 건물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는 언더우드 관.<br>개화기 때 지어진 건물로 사적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상. 뒤의 건물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는 언더우드 관.

* 2024년 새문안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에서 발췌.

작년 5월, 김진홍 교수가 내게 연락해 올해 새문안 언더우드국제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하도록 초청하였다. 심포지엄의 초점을 아직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아버지를 만나 그의 할아버지(호러스 그랜트언더우드)의 삶의 어떤 측면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여쭈었다.

“아버지, 이번이 아버지께서 제가무엇을 강연해야 하는지 저에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요, 말씀하시는 대로 제가 할게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고 곧바로 “할아버지의 에큐메니즘과 연합 활동”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한 달 후 김진홍 교수가 연락을 주어 올해 심포지엄에 관한 세부 사항들과 함께 논의 주제가 에큐메니즘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나는 진한 전율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일 중 많은 것을 이어받아 한국에서 선교를 위한 에큐메니칼 활동에 분명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그의 일차적 임무는 후에 연세대학교가 된 조선기독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 연희전문학교)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거의 모든 에큐메니칼 노력에도 참여하였고 재임 중 거의 모든 이사회의 멤버로서 활동하였다.

한국의 독립 이후 서울로 돌아왔을 때조차도 공식적으로는 미군정과 함께 활동했지만 남는 시간에는 거의 모든 외국 선교 및 연합 기관들을 위해 활동하였고 그들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계획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그 또한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해 1930년대에 단호히 강경하고 논쟁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이 문제는 연합이 아니라 교회 분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었다. 이렇게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내게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그의 부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또한 종종 선교에서 논쟁적인 일들에 관여하였다.

물론 이번 심포지엄의 초점은 그의 연합 활동이지만, 바로 그러한 논쟁적인 일들로 인해 그는 동료 장로교 선교사들과 종종 충돌하였다. 그는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와의 여행을 포함하여 일찍이 복음 전도 여행을 다녔는데 이로 인해 보다 신중한 접근을 선호했던 몇몇 동료 선교사들의 분노를 샀다. 언더우드가 1893년에 만든 찬송가는 공인이 거부되었지만 본래 연합적인 사용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고, 신에 대한 명칭으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모든 이들이 각자 선호하는 용어에 상관없이 찬송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언더우드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속한 선교회는 그의 행동이 갈등을 조장한다고 보았고 찬송가를 사용하지 않기로 투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 중의 하나는 서울에 연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선교회가 거의 둘로 갈라졌고 선교회 내에 너무나도 큰 악의적 여론이 조성된 나머지, 그의 아내에 따르면,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그가 일찍 죽게 되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가 특히 자신의 일가족의 재정 기부들을 기초로 영향력을 휘두르며 갈등을 일으키는 고집쟁이 잉글리쉬 불독들인 동시에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특징들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롭게 볼 수 있는가?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관심과 영향력에 관한 우려는 그 다음 세대에도 지속되었다. 최근에 나는 아버지의 선교회 활동이 두 번이나 거부되었음과 그가 활동을 재개할 시 한국 교회와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단체와만 활동하는 조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과 다른 선교사들 사이의 이러한 갈등을 살펴보는 것은 에큐메니즘에 대한 그들의 접근과 헌신 외에 그들의 특성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들과 에큐메니즘에 관한 어떤 개략적 서술도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남편의 전기에서 알렉산더 워 목사에 관해 했던 논의를 고려해야 한다.

릴리아스에 따르면 워의 “성격, 재능, 그리고 정신적 태도는 …… 증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현저히 유사하였다.” 워(1754-1827)는 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고, 에딘버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런던의 대형 스코틀랜드 비국교도 (장로교)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워는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단, 감리교로 구성된 기독교 목사들의 단체”가 감독하는 에큐메니칼 출판물인 에반젤리컬 잡지(the Evangelical Magazine)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고자가 되었다. 이후런던 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로 알려지게 될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적 선교사회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 잡지의 지면에서 1795년 최초로 제안, 논의되었다. 그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여생을 런던선교회와 함께 활동하였던 워 목사는 런던 선교회의 “근본적 원칙”을 형성한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고 한다.

릴리아스에 따르면 워에 관한 묘사는 (회고록에 근거한 것임에 틀림없는데) 남편의 성격과 너무나 비슷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릴리아스는 “마치 워의 겉모습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겉모습에 그대로 붙어버린 것 같았다”고 썼다. 릴리아스는 둘 사이의 공통된 특징들로 “관대함, 광범위한 박애주의, 통합에 대한 사랑, 자선, 지도자적 자질들”을 꼽았다. 선교 기록에 근거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의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과는 달리, 알렉산더 워에 관한 기록은 그를 중재자로 기술하고 있지만 여전히 릴리아스가 열거한 유사점들은 예리하다. 아마도 어떤 기록도 완전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워의 특성에 관한 나의 유일한 정보 출처는 가족과 사랑하는 친구들이 쓰고 엮은 그의 회고록이 아니던가. 그리고 기타 상황들-특히 한국에서 선교회들 사이에 선교지 분할논의를 할 때와 연합 기관들을 형성할 때-에서 언더우드 또한 중재자의 특징을 보였다.

릴리아스에 따르면 감리교의 관점에서 볼 때 연합을 가능케 했던 이는 바로 언더우드였다. 아들에게 보낸 1911년의 어느 편지에서 릴리아스는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Noble)이 호러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오 언더우드, 이곳의 분위기가 평양과는 얼마나 다른지 당신은 모를 거에요. 매우 개방적이고 형제애가 넘치며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아주 자유롭고 행복하게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갈등에 대한 접근과 반응에서 그들의 특성과 가치에 관한 가장 분명한 몇몇 통찰을 발견하였다. 알렉산더 워의 것들을 포함한 그들의 글과 가족 편지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에큐메니즘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접근 방식을 형성하고 이에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공통된 개인적 가치 특징들을 발견하였다. 그 세 가지는 더 높은 목적에 대한 중요성과 인식, 심판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개인의자유와 책임에 대한 강한 의식이다.

나는 첫째 특징, 즉 더 높은 목적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하나 됨의 추구에 있어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들, 즉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 개별적인별도의 목표 지원을 위한 공리주의적 목적들을 위해서, 그리고 더 높은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함께 연합한다.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이 19세기 개신교 선교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인데 19세기 개신교 선교 운동 자체는 복음주의적 대각성 운동의 특징인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탄생하였다. 그러한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 및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얻고자 하는 분명한 필요와 열심이 합력하여 개신교 교단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넘어설 수 있었다. 알렉산더 워와 연결된 런던 선교회는 그리스도를 세상과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하여 함께 모인 주요 사례이다.

그러나 런던 선교회의 형성 전에도 워와 그의 동료들은 이미 자신들의 고매한 목적에 집중하였다. 1793년 존 뉴턴(John Newton)이 워에게 보낸 편지는 이러한 일치를 군사적 용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입은 군복에는 차이가 있으나 구원이라는 유일한 대의 하에서 당신과 나는 하나의 군대에 속해있다. 우리의 무기, 재원, 목표, 적은 동일하다. 그리고 선한 군인은 자신의 배정 초소를 지키는 데에 관심을 두는 동시에 전체의 성공을 위해 나머지 초소들에도 동일한 관심을 느낀다. 워에게 ‘세상의 빛’이 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은 모든 분열을 초월하였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빌립보서 2장 14-16절에 근거하여 런던 선교회 설립 2주년에 행한 설교에서 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의 고양된 빛들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철학이나 해설, 또는 “총회, 회합, 혹은 공의회의 결정들”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들에는 많은 진리가 있을 수 있지만 …… 또한 많은 오류도 있을 수 있다. 반면 ‘생명의 말씀’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우리의 마음이 그(하나님의 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가까이 붙으며,” 또한 “우리 사이에 원망과 시비를 일으키는 갈등적 원리들을 배제한다.” 복음 전도의 열심은 또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연합 사역을 포함하여 그의 삶과 선교 활동들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에 따르면 어릴 때에도 언더우드와 형제들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신학교 재학 중에는 하나의 복음 전도 활동으로부터 또 다른 복음 전도 활동으로 항상 뛰어다녔으며, 구세군이 노래하는 곳을 지날 때에는 함께 노래하기 위하여 늘 멈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 전도 부르심의 범위는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국으로 부르시는 것을 느낀 후에는 곧바로 “한국의 부름”에 국한하여 집중되었고 그러한 부르심을 따르며 교파적 관심들을 내려놓았다. 그는 개혁 교회(the Reformed Church)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려 할 때- 혹은 그럴 수 없었을 때- 장로교 선교회(thePresbyterian Board)에 이들을 받아들여 줄 것을 신속하고도 주저 없이 호소했다. 그는 여러 차례 장로교선교회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복음 전도 활동이 동료 선교사들에 의해 좌절감을 맛보자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국의 교회에 직접 및 서면으로, 자신의 교단 인맥을 넘어 모든 교단들에 한국을 위하여 호소하였다. 한국에서의 복음 전도를 향한 그의 강렬한 열심은 그가 선교회와 가족에게 보낸 초기 편지들에서 뚜렷이 감지된다. 1887년에 그는 자신의 형 프레더릭 윌즈(Frederick Wills Underwood)에게 더 많은 사역자들이 필요하다고 썼다. “때로 이것을 생각할 때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나는 짐을 싸고 빨리 고향으로 달려가 몇 개월 동안 ‘성령의 검’으로 십자군 전쟁을 싸우도록 설교해야만 할 것 같아.”

그러한 열심이 어떻게 그로 하여금 교단 간 경계들을 넘어 활동하도록 하였는지, 또한 어떻게 선교회 내에서 “원망과 시비”를 일으켰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심은 증조부 워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젊은 나이의 그에게는 워의 “회유적 기질”이 상당히 결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헌신은 교단적 차이 및 기타 분열을 넘어 주목 할 만한 활동들에 기여하였다. 더욱이, 워처럼, 그도 종국에는 중재자와 통합자로 알려지게 되었다.더 높은 목적을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가 1933년 1월 “기독교 문서 주일”에 영어권 서울연합교회에서 행한 설교 중 명확히 제시되었다. 달란트 비유에 근거, 비유에 나오는 세 번 째 종처럼 땅에 안전하게 묻음으로써 연합 활동을 위한 투자금을 보호하려는 선교회들의 경향을 경고하면서, 그는 “실질적 연합”에 관해 논하였다. 예를 들어, 북장로교선교회의 현재 이사들이 자신들이 선교회와 그 활동, 그리고 선교회에 대한 이익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연합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아펜젤러 선교사와 내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면 우리가 함께 여행할 배 한 척을 빌리는 경우에 그가 자신의 비용을 다 지불하였는지, 그리고 나도 그처럼 충분한 갑판 자리나 좋은 선실을 얻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나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모두 생명을 구하는 승무원들이라면 우리의 몫이나 자리, 또는 나의 짐에 관하여 다투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 “내 소유와 네 소유”를 뛰어넘는 목적을 위한 실질적 연합 하에 나의 이익과 그의 이익은 공동으로 함께 하기에 영원히 상실되는 것이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는 연합에 관한 그리스도의 묘사는 단지 이해관계들의 결합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는 결합체에서 개인의 이익이 상실되는” 가족 또는 포도나무의 결합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의 한국에 대한 헌신과 복음 전파에 대한 헌신은 하나로 아우러져 그에게 이 두 가지는 거의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내게 있을 것이다”라는 태도를 견지하였던 반면에,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는 한국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압도적 대의로 견지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은 1940년 말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대탈출에 대한 그와 그의 아내(에델 언더우드)의 반응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선교회로부터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학교)을 사임하거나 선교지를 떠나도록 요청받았던 것으로 보인 이후인 1940년 12월 4일에 편지를 쓰며 에델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상황을 더 편안히 해주려고 사임할 계획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도움이 되는 한 우리는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학교)과 함께 머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독교인의 봉사가 계속 필요한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 여기 묻힐 계획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엘리자베스 언더우드 박사
엘리자베스 언더우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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