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겔 설교] 혼탁한 세상 속,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주
[데겔 설교] 혼탁한 세상 속,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주
  • 홍상태 목사
  • 승인 2024.05.31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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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마가복음 4장 35-41

*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에서 발췌

신학적 관점

예수 통치의 특징 (앞으로 세 주 복음서 본문의 주제)

예수는 누구인가 그의 권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수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고, 주위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이번 주일부터 시작하여 3주 동안의 본문은 기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예수의 왕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을 준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왕권의 근거가 되는 권위의 원천이 그의 순종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예수가 어떻게 왕인가? 답1: 예수는 창조된 질서의 주제자이다. 파도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를 다루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침착하고 확신에 찬 모습과 제자들의 고통스러워하고 염려하는 모습이 대조된다. 양자 간의 차이는 믿음의 질의 차이다. 예수는 배에 오를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높은 권위는 그의 깊은 믿음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술책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권력의 상징이나 강제적 도구 등이 필요 없다. 그는 폭풍 치는 가운데도 편안하게 잠을 잔다. 이에 반해, 제자들은 폭풍의 위력에 대항하기 위해 전력을 다 쏟아내면서, 인간적인 노력이 자연의 위력과 상대가 될 것이라고 헛된 기대를 한다.

오늘 이야기 속에서 예수는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혼돈을 잔잔케 하고, 죽음의 위협을 제압하고, 생명의 지속을 확보한다. 예수는 모든 요소들 위에 신과 같은 탁월함을 행사하고, 이를 근거로 우리는 “이 분이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예수의 신적 권위의 행사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수로 자연의 질서를 바꿀 수 있게 하는 신적인 권위의 근거는 무엇인가?”

마가복음 학자들 간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메시아적 호칭에 관해 수십 년 동안 열띤 토론이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 많이 사용되고, 이단적 요소가 있는) 그리스-로마권에서 사용된 “신성한 인간(divine man, theios anēr)”이라는 단어를 교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한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의 왕권 행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그 의미를 확장해본다면 설교를 듣기 위해 앉아 있는 전 교회의 반응도)도 신학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의 시편 본문인 시 107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29-30) 그런데 제자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을 보니 그들은 “큰 경외심에 사로잡혔다.(filled with great awe).” KJV은 “they feared exceedingly”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phobos megas (they were afraid with great fear)라는 그리스 표현을 더 잘 번역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난제가 등장한다: 예수는 근원적 혼돈에 대해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다. 그는 창조된 질서의 주제자시다. 그런데 이런 신적인 위력의 행사를 본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기쁨이나 찬양이나 환호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경이로운 예수의 신적인 능력은 대조적으로 우리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가가 제자들의 인격과 행동을 통해 구성하는 인간론은 매우 냉혹하다. 제자들의 반응은 시편 107편에 나오는 믿는 자들의 반응과 대조가 된다. 시편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능력을 행사하심에 대해 기뻐했고, 감사했고, 찬양했다. 이것이 믿음에 근거한 반응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에서는 기쁨의 요소를 찾을 수 없다. 제자들의 반응에는 마가복음이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갖는 것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보이며, 이것은 자연의 질서에 대해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예수의 절대적인 믿음 및 순종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불신앙의 주제는 두 주 후의 복음서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 전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온다(4:1-34).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위한 이 비유의 통찰력과 의미가 내부자에게만 가능하다고 말한 뒤(10-12절), 예수는 비유의 의미를 그의 내부자들인 제자들에게만 설명했다(13-20, 33-34). 그런데 뒤에 나오는 폭풍의 위험과 이어지는 기적에서는 바로 이 내부자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큰 파도(37-38)

곧바로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졌다. 숙련된 어부들도 이 상황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은 예수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쩌면 그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예수는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의 믿음이 이 난리 가운데에서도 곤히 주무시는 예수와 같이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마가는 풍랑중에 잠을 자는 요나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다(욘 1:5-6). 요나가 탄 배의 선원들과 같이 공황 중에 제자들도 예수께 부르짖고 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깊고 고요한 예수의 잠과 이 폭풍이 가져올 파괴와 죽음이 비교되고 있다.

큰 고요(39)

요나이야기에서 선원들은 요나를 깨워 그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한다(욘 1:6). 마가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고 그가 잠을 자는 태평함을 탓하고 있다(마태에서는 제자들이 예수가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간청하고 있고 [마8:25], 누가에서는 예수를 탓하지 않고 다가온 재난을 알려준다[눅8:24a]. 예수는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호령하여 잠잠케 한다. ‘꾸짖고’ ‘잠잠케’한 것은 귀신에게도 사용했다(막1:25). 그러기에 마가는 바다의 폭풍이 귀신들이나 신 또는 바다 괴물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유대와 그리스 로마의 신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시편에서는 야훼를 육지와 바다의 주님으로 말한다(시104:3-4;107:24-32). 예수도 또한 자연과 그것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권세를 갖고 있다. 거센 바람이 바다의 심한 폭풍을 가져왔다. 예수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폭풍을 잠잠케 했다. 그 결과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예수의 말씀으로 큰 폭풍은 큰 고요가 된 것이다. (중략)

이분은 누구인가?(41)

본문에서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큰 폭풍’이 ‘큰 고요’가 된 것이 그들에게 ‘큰 믿음’의 표적이 되기보다는 ‘큰 두려움’의 원천이 되었다. 복음서 기자는 제자들이 예수가 한 것에 대해 경외감과 존경을 느꼈다는 것을 말하며 이 반응을 무마시키려 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제자들이 이 단계에서는 예수와 그의 행동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예수의 행동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그의 고백에 이어 금방 실족하고(8:3-33), 여인들이 무덤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바로 그들 눈앞의 증거를 보고도 확신보다는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려움의 요소는 마가의 독자들에게도 도전을 던진다. 그들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믿음으로 반응할 것인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인가?

목회적 관점

우리는 반대, 거절, 실패, 무의미, 질병을 두려워하고,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 자신의 죽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가복음 4장이 설교자와 회중에게 보여주는 암울한 목회 현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실한 제자들의 현실이고, 힘 빠지게 만드는 제자들의 불안에 대한 예수의 사랑스러운 그러나 확고한 반응이다.

바다와 폭풍과 우리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는 연약한 쪽배는 우리 인생의 여정의 은유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항해는 위험하고, 우리를 태우고 우리의 길을 가는 쪽배는 쉽게 상처받고, 우리는 우리와 폭풍 모두를 잔잔하게 하는 바로 그 분을 갈망하고 있다.

어떤 교회들은 오늘의 본문을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자연 기적 이야기로 읽을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두려움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두려움은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제자들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그들은 결코 스스로 뭉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내적인 자원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제자들과 폭풍을 잠잠하게 한 것은 예수가 거기 계신다는 사실이 가진 힘이었다.

이 본문에서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은 청중에게 그들 자신이 잊고 있는 용기를 발견하라는 도전이 아니라, 갈릴리바다의 폭풍과 우리 인생의 성난 폭풍보다 훨씬 강하신, 바람과 파도의 주님을 향하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서워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갈릴리의 폭풍은 의심의 여지없이 두려운 것이고, 우리를 위협하는 “바람과 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신다.

(중략) 두려운 일들은 실제로 있다. 고립, 고통, 무의미, 거절, 실업, 재정 문제, 실패, 질병 그리고 죽음.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장하면, 두려운 일들이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들은 우리를 정복할 궁극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그것들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의 처음이고 마지막 말이다. 이 말은 천사가 두려워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한 말이고, 여인들이 무덤이 빈 것을 발견했을 때 무덤에서 들려 온 말이다. “무서워하지 말라.” 바다나 우리 시대에 무서워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고, 폭풍도 없고 거센 바람이나 파도도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설교적 관점

(중략) 이방인의 영역으로 자신의 선교를 감당하면서,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들,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the others), 심지어 이스라엘의 적대자들에게까지 다가간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 교회를 위한 모델이 된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누가 낯선 사람들이고 우리가 소홀히 했던 외부의 사람들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전의 증오와 두려움으로 기독교의 환대 (hospitality)가 미치지 못한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확언하는 복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는 포용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매우 날카롭고 시기적절한 메시지이다. “바다 저편”으로 가는 도중에 이 배는 “거센 바람” (37절)을 만나는데 그것은 종종 바람이 사나운 갈릴리 바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와 함께 배에 탄 제자들은 그 가운데 직업이 어부인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바다상황에 익숙해있다.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해줄 힘을 지니고 있는 한 승객과 함께 있는 일이다.

마가복음에서 아직 예수의 정체성은 아직 불분명하고 제자들의 믿음 또한 여전히 미약하다. 그 때 이 사건은 거센 바람 가운데서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과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또 절박한 가운데 예수만이 줄 수 있는 평온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바라는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도 보여주는 분명한 순간이 되고 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깨우고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38절)라면서 비난이 서려있는 탄원을 한다. 모든 설교자들은 심지어 믿음을 지닌 사람들로부터도 이러한 외침을 들어오곤 했다.

허리케인, 쓰나미, 지난 몇 년간의 홍수를 포함한 자연재해들 혹은 테러리스트의 공격, 전쟁, 설명할 수 없는 폭력 등으로 인한 비극적인 일들 또 여러 개인적 고통으로 인한 아픔 등은 하나님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라고 외치게 만든다. 이런 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중 누군가 이 외침에 대한 답을 달라고 설교자에게 요청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같기에 두려움과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이 느낌과 또 그 느낌에서 나오는 분노를 규명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을 때 "고요하고, 잠잠하여라!"라고(39절) 말한다. 그 후 본문은 우리에게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예수에게서 드러나 놀라운 일을 행한 거의 최초의, 아마 유일한 예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공허로부터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다. 다시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육신이 되셨다. 이 두 사건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은 한 민족을 불러내었고 그 민족을 인도했던 예언자들을 감동시켰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혼란과 복잡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말하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그리고 무서운 폭풍을 향해 예수께서 잠잠하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권세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의 깊은 두려움을 고요하게 한다.

2005년 가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강타한 직후 찍은 사진 한 장은 이 역사적인 도시에 있는 한 공동묘지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무들은 부러져있고 땅 위에는 파편조각들이 돌아다니고 몇몇 묘지는 부서지고 파손되었다. 그런데 이 황폐한 가운데서도 폭풍우가 건드리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동상으로 팔을 넓게 벌리고 혼돈가운데서 평안의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본문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그 이미지는 혼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팔을 넓게 벌리고 "평안하거라! 고요하거라!”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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